/이지민 지음/그책 발행ㆍ256쪽ㆍ1만원
"운명은 비참한 것이나 생명은 아름다웠다. 운명이 아무리 거대해도 그것은 생명의 일부였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내 안의 사랑과 희망과 따뜻함을 죽였으나 나는 살려두었다."(161쪽)
1954년 2월, 서울.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깨달은 이 전후 도시. 폐허의 도시에도 봄이 왔다. 불타버린 시가지, 미군 지프를 쫓아다니는 전쟁고아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종종걸음하는 여인들 같은 풍경이 전후세대가 떠올리는 당시의 서울이다. 등단작 <모던보이: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2000)에서 암혹기였던 1930년대 경성을 활기찬 근대화ㆍ도시화의 공간으로 되살려내며 '뒤집어 바라보기'를 시도했던 소설가 이지민(35)씨. 이씨가 이번에는 새 장편소설 <나와 마릴린> 에서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에 대한 뒤집어 보기를 시도한다. 나와> 모던보이:>
주인공은 일제시대 도쿄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해방 후에는 친일관리 출신 삼촌의 '빽'으로 미군정청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엘리트 여성 앨리스 J 킴이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서울은 어디를 가나 '자유부인'이 얘기되는, 수많은 죽음을 딛고 일어선 욕망이 꿈틀거리는 공간이다. 작가는 당시의 서울을 '다방 마담, 시내 양품점 여사장, 요리점 주인, 딸라 장사, 돈 많은 전쟁미망인, 고관대작 부인, 여선생, 첩, 여대생 같은' 아프레 걸(전후 여성)들이 댄스홀에서 발랄한 꽃잎처럼 춤을 추고, 재래시장이 뿜어내는 활기와 소음은 전장만큼 치열하게 생동했던 도시로 되살려낸다. 소설은 앨리스와 그녀의 첫번째 연인이었던 로맨티스트 공산주의자 여명환, 여명환의 친구로 그녀의 두번째 연인이었던 선교사를 가장한 미군 정보요원 요셉 간의 삼각관계와 주한미군 위문차 한국을 찾은 마릴린 먼로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 앨리스의 3박 4일을 축으로 전개된다.
전쟁 도중 유부남이던 여명환의 딸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그녀를 죽음에 몰아넣었던 트라우마를 안고 전후의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앨리스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망각이 생존의 조건이 된' 그래서 전쟁에서 입은 영혼의 상처를 섹스로, 춤으로, 소비로 치유하려는 당대 인간군상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우리의 영혼을 관통했다는 사실을 우리만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라는 앨리스의 독백은 자기를 속이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는 전후 인간들의 고통을 처절하게 대변한다.
절망과 허무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심리 묘사, '나의 중얼거림이 검은 커피 속으로 자살하는 처녀처럼 풍덩 빠진다' '불륜의 관계에 있어 죄책감은 최고의 최음제다'와 같은 감각적인 문장은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의 맥박을 고조시킨다.
소설은 한국을 찾은 마릴린 먼로가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했다. 영혼의 상처를 입은 앨리스가, 모든 남성의 연인으로 '욕망'의 아이콘이지만 쓸쓸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마릴린 먼로와 조우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작가 이씨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자들 모두 그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춤추고 노래하며 진정 살아있음을 만끽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며 "죽었던 생명력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전후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고 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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