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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외상장부 속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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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외상장부 속 철학

입력
2009.07.3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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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전후 광화문 뒷골목 술집의 외상장부가 어제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개되고 있다. '사직골 대머리집'의 장부는 총 3권인데, 그 중 검은색 하드커버에 옆면이 붉은 색으로 칠해진 속칭 '떼놈장부'가 특히 눈길을 끈다. 200~300장에 달하는 이 장부를 깨알 같은 글씨로 다 메웠으니 그 집의 명성을 알 만하다. 일반 주점의 장부는 대부분 어른 손바닥 만한 크기에 20~30장짜리로, 한 쪽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몽당연필과 함께 출입구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덜 취했을 경우 손님 스스로 금액을 써넣기도 하고, 만취했을 땐 주인이 알아서 기록했다.

▦1970년대 대학가 술집의 외상장부가 공개됐던 적이 있었다. 10여년 전 서울대 근처 '일미집' 얘기였는데, 이 경우는 장부가 아니라 '학생증 묶음'이었다. 동숭동 시절부터 관악산 시절까지, 종이학생증에서 비닐학생증까지 100여장이 공개됐다. 뒷면에 연필이나 색연필로 술자리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렇게 학생증이 술집에 보관돼 있다는 것은 결국 술값을 떼어먹었다는 얘기인데, 유명인사도 많았으나 누구도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일미집과 쌍벽을 이뤘던 녹두집, 고려대 앞 고모집 총각집, 연세대 인근 보은집 개성집 등도 마찬가지였다.

▦술집 외상장부의 묘미는 떼어먹는 데 있다. 처음 가서 외상을 트고, 다음에 가면 이전 것을 계산하고 다시 외상을 달아 놓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다. 단골이 되어 거래가 이어지면 결국 한번의 술값은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묘미는 남이 대신 갚아주는 데 있다. 한국일보의 예를 들면, 신문사 근처 여기저기에 기자들의 외상장부가 매달려 있었을 시절 사주나 회사 간부가 이들을 몽땅 회수하여 대리결제를 해주곤 했었다. 퇴근 후 술자리까지 감시 당하는 듯한 부작용(?)이야 있었겠지만 외상장부가 갖는 미풍양속의 하나였다.

▦이런 묘미는 신용카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마이너스통장과도 연결된 신용카드는 업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관리하는 현대판 외상장부다. 대머리집의 장부나 일미집의 학생증은 매달 통보되는 사용내역서로 변했다. 떼어먹으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사회생활이 차단되고, 대리결제는 법인카드로 통제된다. 외상장부는 지출과 동시에 기록되지만 신용카드는 사후에 통지가 오니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속담에 더 가깝다. '외상 대란'이라는 말은 금시초문이나 '카드 대란'으로 경제가 휘청거린 적은 있었다. 외상장부에는 지혜와 철학이 담겨 있었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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