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 춘양은 첩첩산중의 궁벽한 곳이다. 춘양읍에서도 한참을 농로를 따라 들어가 와선정(臥仙亭)이란 외딴 정자를 만났다. 아름드리 노송의 초록 그림자를 이고 있는 정자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 왔다.
짙푸른 가지 사이로 정자에 모인 어른들의 모습이 살짝 비쳤다. 보통은 비어 있을 정자인데 무슨 모임이라도 열린 걸까? 계곡을 건너는 오현교를 넘어 정자로 들어섰다.
창문을 활짝 들어 올려 계곡의 푸르름을 그대로 끌어안은 정자 안에는 머리 하얀 십여 명의 어른들이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가며 주거니 받거니 술을 권하고 있었다. 정자 밖 곳곳에서도 많은 분들이 음식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중복(中伏)이다. 시원한 정자로 복달임을 하러 나오셨나?
편안하게만 보이는 모임이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역사가 간단치 않다. 와선정 모임의 시작은 3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1636년. 청이 조선 땅을 침탈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피란을 떠났고, 첩첩산중 오지 중의 오지인 봉화 땅으로도 올곧은 선비들 여럿이 발을 들였다. 굴욕적인 삼전도의 항복을 전해 들은 여러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초야에 묻고 은둔을 선택했다.
그 중 잠은(潛隱) 강흡 선생과 두곡(杜谷) 홍우정 선생, 각금당(覺今堂) 심장세 선생, 포옹(抱翁) 정양 선생, 손우당(遜愚堂) 홍석 선생 등 다섯 분의 선비들이 가깝게 교류하며 정을 나눴다.
이들은 지금의 와선정이 있는 와선대를 모임 장소로 삼고, 일년 중 좋은 날을 잡아 회합을 가졌다. 하얀 도포에 갓을 정갈히 갖춘 선비들이 스스로 '은폭(銀瀑)'이라 이름 붙인 하얀 폭포를 바라보며 시를 짓고 글을 논했다. 시간이 흘러 정조 14년에 왕명으로 발간된 <존주록배신열전> 은 이들 다섯 선비를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받들며 경의를 표했다. 존주록배신열전>
오현의 모임은 그들 대에서 멈추지 않고 후손들로 이어졌다. 자손들은 돈을 모아 와선대에 정자를 짓고 와선정별소계를 조직, 대대로 조상의 덕을 기렸다.
삼월삼짇날이나 단오에 모이던 계는 어느 때부턴가 매년 중복에 맞춰 이어 나갔다. 정자에 오손도손 모여선 다섯 문중의 후손들은 오현의 덕을 추앙하며 혈육보다 진한 정을 나누고 전통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370여년을 함께한 것이다.
예전에야 의관을 갖추고 시를 읊던 모임이었지만 지금은 함께 식사를 나누고 더위를 식히며 안부를 묻는 자리가 됐다. 하지만 조상을 기리며 조상에게 욕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이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
문중에선 나이보다 서열이 먼저라지만 여러 가문이 모이다 보니 그저 서로 존대하고 지낸다. 잦은 교류가 있다 보니 집안끼리 혼사도 많이 이뤄졌다. 집안에 큰 일이 생기면 서로 제 일인 양 돕고 도움을 받았다.
이날 정자에 자리한 어른들은 저마다 선조들을 이야기하며 또 정자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억센 사투리에 어려운 한자말들이 오가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누군가 이제 와선정에 대한 책을 내야 하니 각 문중이 지니고 있는 자료 좀 취합하자고 제안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고령의 어르신들이다. 여든 넘으신 어른들도 여러 분 자리를 지켰다. 음식은 젊은 축의 참석자들 몇몇이 아침에 장을 봐 마련하는데 이날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이날 모인 분들 중 가장 젊은 강신황(61)씨는 "예전엔 시회가 중심이다 보니 남자들만 모이게 됐고, 아녀자들은 참석 안 하는 게 나름의 전통으로 굳어졌다"고 설명했다.
요즘은 3, 4시간 안에 모임을 끝내지만 예전엔 3일 정도 함께 지내는 큰 행사였다고 한다. 홍준선(76)씨는 "교통이 미비했던 시절 산골의 정자로 모여야 했으니 오는 데 하루, 노는 데 하루, 가는 데 하루가 걸렸다"고 했다. 당시 와선정 모임은 동네의 큰 잔치였다. 음식이 귀한 시절, 모임이 열리면 아랫마을 윗마을 사람들 죄다 불러 음식을 베풀며 조상의 덕을 나눴다.
자제분들은 참석 안 하냐는 질문에 어르신들은 "나이 들면 오겠지. 대처에 나가 직장 다니는 젊은이들이 쉽게 오겠어. 좀 지나 나이를 먹게 되면 저절로 조상도 챙겨 보게 되고, 옛것을 알려고 하게 될 것"이라고 답하셨다. 지금껏 지켜 온 선비의 맥이 앞으로도 같은 시간 만큼 이어지기를 어르신들은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었다.
봉화= 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옛 선비의 풍류가 흐르는… 정자의 고장 봉화
은둔의 땅 경북 봉화군은 정자의 고장이다. 봉화 땅 여기저기에 100개 가까운 정자가 터를 잡고 있다. 사라진 정자까지 합하면 17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숫자다.
봉화의 많은 정자들 중 최고로 꼽는 곳은 봉화읍 닭실마을의 청암정이다.
닭실마을은 조선조 권문세가인 안동 권씨 일가의 집성촌이다. 마을의 지세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닭실마을로 불린다. 조선 중종 때 문신인 충재 권벌 선생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지금도 120여가구가 함께 모여 산다.
종택의 한쪽 가에 연못으로 둘러싸인 청암정이 있다. 기묘한 생김새의 거북 바위에 정자가 살포시 내려 앉아 있다. 인공과 자연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보완하는, 최적의 조화가 만든 절경이다. 종택의 종손 권용철(66)씨는 "담양군의 소쇄원하고도 바꿀 수 없는 걸작"이라고 했다.
정자 한쪽엔 마루가 아닌 온돌이 깔렸었다고 한다. 겨울에 춥기 때문에 군불을 때야만 했다. 당시 불을 때면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 괴히 여기던 중 지나가던 한 스님이 거북이 등에 불을 지펴선 안 된다고 해 아궁이와 온돌을 없애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청암정은 기가 세다고 한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정자에 앉아 있으면 머리 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종손의 아들 종목(37)씨는 "밤에 혼자 정자에서 잠을 청해 봤지만 쿵쿵 소리가 나는 것 같고 정자가 살아 꿈틀대는 것 같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고 경험을 털어 놓았다.
청암정은 손님을 맞거나 동네 어르신들이 책을 읽고 시회를 여는 장소로 활용됐다. 이곳으로 식사를 내오기는 했지만 술상이 차려지진 않았다고 한다. 연회나 술자리는 인근 석천계곡의 석천정사에서 이뤄졌다.
청암정 앞에는 충재선생박물관이 있다. 원래 종택 마당에 있던 유물관을 옮겨 지은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허름해 보여도 이 박물관이 소유한 유물은 보물급만 482점에 달한다. 한 집안의 유물이 아닌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는 박물관이다.
닭실마을을 끼고 흐르는 석천계곡은 맑은 물과 울창한 송림, 기암괴석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계곡의 첫머리에 석천정사가 있다. 건물은 지금 해체 복원 중이다. 일제 때 덧씌운 시멘트 석축이 벗겨지면서 전통 석축이 제 모습을 찾고 있다.
공사 중인 탓에 정자의 아름다움이 쉽게 와 닿진 않는다. 공사 중인 건물 안에 들어가 창 밖으로 계곡을 바라보니 석천계곡이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계곡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창틀의 프레임이 담고 있었다.
충재 집안은 춘양면에 한수정이란 또 다른 아름다운 정자를 가지고 있다.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이다. 날렵한 팔작지붕의 정자를 연못이 3면으로 감싸고 있다.
봉화읍 초입의 도암정도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정자 앞 너른 연못에는 수박만한 연꽃들이 만개해 있다. 동그란 인공섬에는 소나무 한 그루 곧게 뻗어 올랐다. 정자 오른편에는 커다랗고 둥글둥글한 3개의 바위가 모여 있다.
우애 좋은 삼형제를 모아 놓은 듯 정겨운 모습이다. 도암정 문이 열려 있어 정자 위로 올라섰다. 마루판 여기저기에 재떨이와 장기판 바둑판이 놓여져 있다. 지금도 편안한 쉼터로 주민들과 호흡하는 공간이다.
석천계곡과 겨룰만한 계곡으로 사미정계곡이 있다. 이 계곡의 초입에 있는 사미정도 꽤나 운치있는 정자다.
봉화= 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동업자계… 결혼계… 뮤지컬계… 핑계도 좋아요
주식 펀드 부동산 등 부의 축적 수단이 다양해진 요즘 계는 그다지 각광받지 못하는 재테크 수단이다. 하지만 계는 타인을 신뢰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현대인에게 지속적 인간 관계를 형성해 주는 주요한 모티프다.
이 인간 관계 덕분에 계에 나가면 사업을 위한 고급 정보와 노동력을 얻을 수 있고, 손이 급할 때 자질구레한 일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취미 활동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재테크+α'의 이익이 있는 조직인 것이다.
● 계원 있는 곳에 정보 있다
해외 유명 남성복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인 백모(32)씨는 패션 업체 홍보 담당자, 스타일리스트, 홍보대행사 대표 등 10여명과 함께 목돈 한 번 만들어 보자며 계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매달 1인당 5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낸다.
하지만 목돈 마련 이상으로 눈여겨봐야 할 이 모임의 장점은 바로 업무상의 도움이다. 브랜드 간 이직은 잦더라도 동일 업종 내 경력은 길게 유지되는 패션 업계 특성상 이들의 친분은 같은 회사 동료 못지 않게 두텁다.
계원 중 누구든 신규 브랜드 론칭이나 새로운 매장 오픈 등 주요 행사가 있으면 나머지 계원들이 총출동해 일손을 거든다. 의류뿐 아니라 화장품 미용실 등 여러 업체의 홍보 담당자들이 모이다 보니 크고 작은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큰 도움이 된다.
정기 모임 이외에 영화나 브런치 '번개'(갑작스럽게 마련된 모임)를 자주 갖다 보니 각 매체의 패션 담당 기자가 바뀌는 경우에도 좀 더 빨리 알아차리게 되는 편이다.
● 삭막하다고? 상호부조의 전통은 여전히
회사원 박모(31ㆍ여)씨는 고교를 졸업한 1997년부터 3명의 친구들과 계를 조직했다. 목적은 결혼과 자녀의 돌, 부모님 회갑 등에 필요한 자금 몰아 주기. 4명 중 2명이 결혼식을 올리면서 100만원씩을 받아 갔고 이 가운데 1명은 아이 돌잔치 때도 계원들의 도움을 얻었다.
하지만 계의 혜택은 금전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결혼식 당일에 꼭 참석해 신부의 옷가지들을 정리해 주는 일을 모두 계원들이 해 줬다. 현대의 소박한 계가 전통 계의 상조만큼은 아니어도 그나마 삭막한 생활에 활기를 불어 넣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취미를 부탁해
최근 뮤지컬을 처음 접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장모(35ㆍ여)씨는 친구 2명과 계를 만들었다. 결혼 전과 달리 섣불리 취미 생활에 큰 돈을 쓰기 어려운 사정은 친구들도 마찬가지인 까닭에 쉽게 뜻이 모아졌고 월 3만원을 모으기로 했다.
여름을 맞아 대극장 뮤지컬 광고가 홍수를 이루는 것을 보면서 장씨는 내년부터 곗돈을 키울 생각이다. 그에게 계는 힘겨운 생활 속에서 취미 생활이라는 탈출구를 마련해 준 고마운 존재다.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구실을 얻은 것은 덤이다.
취미계의 대표주자는 역시 여행계다. 맘이 잘 맞는 대학원 동기 5명과 2년 전 여행계를 조직한 박모(37)씨는 그 결실로 지난해 여름 싱가포르의 한 리조트로 여행을 다녀 왔다. 2개월마다 10만원을 2년 여간 꾸준히 돈을 모으다 보니 1명당 100만원이 훨씬 넘게 드는 여행 비용을 큰 부담 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
더욱이 휴가 기간 친구 1, 2명과 급하게 계획을 세워 떠나는 대부분의 여행과 달리 쇼핑 마사지 식사 등을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어서 여행의 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 계를 보면 유행이 보여요
한동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한 청바지계 명품계 등에서 알 수 있듯 현대의 계에는 당대 트렌드가 담기기도 한다. 2000년부터 친언니 2명과 계모임을 갖고 있는 회사원 김모(34)씨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자매 간이지만 각자의 바쁜 업무로 얼굴 마주하기가 쉽지 않자 이들은 월 3~5만원을 내고 매달 한번씩 만나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이들이 구입한 품목들에 시대의 유행 풍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 한창 유행했던 브랜드 제품인 김씨의 손목시계나 지난해 급부상한 브랜드인 핸드백 신제품은 모두 이 계를 통해 구입한 것들이다. 자매들은 이 계 덕분에 한때 유행한 새끼손가락에 끼는 일명 '애교 반지' 트렌드도 어렵지 않게 따라잡았다.
김소연 기자
일러스트 김경진기자 jinjin@hk.co.kr
■ 금전적 목적 계는 깨질 위험
분명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전한 풍습이지만 자주 사회 문제로 부각되면서 부정적 이미지도 함께 갖게 된 게 요즘의 계다. 어떤 점을 고려해야 안심하고 계를 할 수 있을까. 계와 관련된 궁금증을 Q & A로 정리했다.
Q: 계의 유래는.
A: 계의 역사에 관한 정설은 없지만 고대 원시공동체 사회 이후 존속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화랑들의 조직체인 향도 등이 그 근원으로 꼽힌다. 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현대의 계처럼 형평성 있는 인간 관계를 토대로 한 계는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했다.
한때 도시화의 영향으로 계가 소멸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여전히 정보 획득 등의 새로운 기능을 더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현대에 접어들어 대인 관계를 확장하고 유지하는 기능으로 주목받으면서 조직체에 들어 있지 않은 주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어 왔다.
Q: 계의 운영 방식은.
A: 정해진 순서에 따라 곗돈을 받는 번호계와 가장 높은 이자를 내겠다고 써 낸 계원부터 곗돈을 타는 낙찰계로 나뉜다. 번호계는 계주의 권한, 또는 제비뽑기로 순번을 정하는 방식이며 낙찰계는 일종의 경매다.
이자를 가장 많이 적어 낸 사람에게 먼저 곗돈이 돌아가기 때문에 돈이 급한 사람은 마이너스 수익률을 감안하고서라도 선순위로 돈을 당겨 쓸 수 있다. 번호계 낙찰계 공히 곗돈을 후순위로 탈수록 높은 금리를 적용 받을 수 있다.
Q: 계 관련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A: 계의 수익은 펀드처럼 자금 운용자인 계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어떤 계주를 만나느냐에 따라 수익률과 위험도가 달라진다. 또 재테크 수단이 다양화한 지금, 금전적 목적으로 계를 찾는 것은 급전이 필요하거나 이자를 높게 얻기 위해서다.
수익이 큰 만큼 위험도도 당연히 높다. 주로 리스크가 발생하는 것은 낙찰계다. 높은 이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선순위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돈을 구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을 가능성도 높다는 의미다.
이 경우 계주의 개인적 자금 유용과 도주 위험뿐 아니라 선순위로 곗돈을 탄 계원이 곗돈 불입을 중단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계를 선택할 때는 금액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믿을 수 있는 계주를 찾아야 하며 유난히 친절한 사람은 경계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
김소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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