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확연한 입장 차이로 입법전쟁을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여야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의 주도로 핵심 법안이 통과됐을 때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볼썽 사나운 몸싸움은 비일비재했고, 장외투쟁 등의 극한 대립도 이어졌다.
그간의 사례를 돌이켜 보면 공수만 바뀌었을 뿐 대부분 '핵심법안 갈등→합의 실패→강행 처리→정국 급랭 및 후유증'이란 패턴이 계속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입법전쟁은 17대 국회 당시 열린우리당의 사학법 강행 처리 때 벌어졌다. 당시 여당인 우리당은 7명으로 구성되는 사립학교 이사진에 학교 구성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형 이사를 4분의 1이상 포함시키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에 한나라당이 '사학의 자율권 침해'라며 강력 반대했고, 여야는 이 문제로 무려 1년 6개월 가량 논쟁을 거듭했으나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2005년 12월 김원기 당시 국회의장이 본회의에서 사학법을 직권상정해 20여분 만에 통과시켰다.
한나라당은 본회의장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극렬 저항했으나 무위로 돌아가자 장외투쟁을 선언한 뒤 거리로 나섰다.
이후 여야는 사학법 재개정 여부를 놓고 끊임없이 충돌을 거듭하다 결국 의견을 접근시켜 2007년 7월 일부 조항을 수정하는 선에서 사학법을 재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김영삼 정부시절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극한 대립을 불렀다. 155명의 신한국당 의원들은 1996년 12월 26일 새벽 본회의장에서 여당 단독으로 복수노조 허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법을 통과시켰다.
야당은 격렬하게 반발해 장외투쟁에 돌입했고, 노동계도 총파업에 나섰다. 이후 여야 합의로 1997년 3월 노동법을 재개정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은 옛 민주당과 함께 헌정사상 처음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했다. 열린우리당은 물리력을 앞세워 탄핵안 가결을 막으려 했지만, 한나라당 소속인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뒤 통과시켰다.
이후 탄핵안 가결에 대한 항의 표시로 대규모 촛불시위가 주요 도시에서 이어졌고, 헌법재판소는 두 달만인 5월 14일 대통령 탄핵안을 기각했다.
현재 여야는 양측의 물리적 충돌 속에 통과된 미디어법에 대해 장외투쟁과 법적 대응 등으로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나 이도 역시 이전 사례들에 비춰보면 크게 생소한 장면은 아니다.
박민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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