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미국과 북한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주변에서 서로 비웃고 헐뜯는 비방을 주고 받았다. 클린턴 국무장관이 "떼쓰는 철부지"라고 비꼬자, 북한은 "초딩 여학생 수준"이라고 맞받았다. 한미 양국이 '포괄적 패키지'로 대화를 유도하는 듯한 움직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방이었다.
거친 말싸움에 이어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협상을 마다하지 않는다"며 짐짓 유화자세를 취했다. 보수쪽은 진정성을 의심하지만, 클린턴의 '비외교적 언사'를 나무란 쪽은 한미 양국에 새삼 대화를 촉구한다. 어지러운 논란에 대결과 대화, 어느 쪽이 대세인지 혼란스럽다.
클린턴 대북정책 변화 알려
혼돈을 헤치는 실마리를 얻으려면 '철부지' 발언의 맥락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클린턴은 ABC 방송의 <굿모닝 아메리카> 에 출연, 북한이 핵실험과 로켓발사로 관심을 끌려는 기대를 결코 채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로서 떼쓰는 철부지들을 상대한 경험에 비춰, 관심을 보이면 안되고 그럴 가치도 없다"는 얘기였다. 굿모닝>
이를 중국관영 신화통신은 '미국의 대북전략 변화'로 풀이했다. 신화통신은 클린턴이 "북한은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일본과 한국 등 동맹국의 우려는 알지만, 그들도 미국과 정보를 공유해 위협의 실체를 알고 있다"고 말한 것에 주목했다. 미국은 줄곧 북한 핵과 미사일이 미 본토까지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4월 로켓발사 때 슬며시 위협을 낮춰 평가하더니, 급기야 "위협이 못 된다"고 공언한 것이다.
미국이 변화한 연유, 전략적 판단은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미국을 위협할 주제가 못 되는 북한을 맞상대할 필요가 없다. 동맹국의 불안은 확장된 억지력, 핵우산을 비롯한 안보 공약을 굳게 다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북한이 뭐라 떠들어도 미국과 감히 핵전쟁을 벌일 리 없고, 일본과 한국에도 성가시게 집적대는 수준을 넘는 도발은 자살 행위이다. 그런 만큼 북한이 먼저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대화와 협상은 없다.
이게 미심쩍거나 '6자 회담 복원'에 집착하는 이들은 미국 관변의 정책조언을 눈 여겨 볼만하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동북아정책센터장 리처드 부시 3세는 최근 하원 소위 증언에서 "동북아 게임 양상이 바뀌었다"며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한 마당에는 6자 회담의 존재이유가 사라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북한은 김정일 사망 후 권력승계가 마무리된 다음에나 변화를 보일 것이라며, 그 때까지 어지간한 제재와 압박은 감내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더욱 단호하게 압박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정세판단을 좇더라도 "북한은 위협이 못 된다"며 오랜 도그마 또는 금기를 스스로 깬 것은 이상하다. 압박을 강화하려면 위협을 강조해야 마땅하다. 이런 의문에 대해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에 대한 안보 위협을 과장한 테러와의 전쟁과 북한ㆍ이란 핵 대응 등으로 동맹과도 소원해진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라는 분석이 눈에 띈다. 미국 자신보다 동맹의 이익과 국제질서 안정을 앞세워 영향력을 회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달라진 북핵 게임 직시해야
이런 시각에서는 미국이 6자 회담에 가름해 '5자 협의'를 강조한 것도 6자 회담 중재국 중국을 견제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방책이다. 클린턴은 이란에 대해서도 은연중 핵개발을 용인하는 듯하면서 동맹국 수호를 다짐했다. 이런 변화는 "미국이 돌아왔다(The US is back)"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분석이다. 또 이게 곧 오바마의 '터프하고 직접적인(tough and direct) 외교'의 실체라는 지적이다. 현실을 직시한 대응이다.
미국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은 중국이 동북아 질서 안정을 위해 북한에 군사행동을 취할 가능성까지 거론한다. 잡다한 분석에 솔깃할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사회 보수와 진보를 가림 없이 북핵 게임의 근본구도가 변한 사실만은 바로 보아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