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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 이리공고 진학과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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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 이리공고 진학과 6·25전쟁

입력
2009.07.27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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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나는 6년제였던 이리공업중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 비록 대학진학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황이었지만 집에서 다닐 수 있는 통학거리로 보자면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적성이 인문계였던 나에게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합격하자 우리 집안의 기쁨은 대단했다. 특히 아버지는 평소 집안을 더럽힌다고 닭을 못 기르게 했지만 내가 중학교에 합격하던 날, 대를 잘라 닭장을 손수 만들어 줄 정도로 기뻐하였다.

그 때 내가 입은 옷은 어머니가 목화를 심어 길쌈을 해 베를 짜고, 거기에 검정물감을 들인 다음, 동네 재봉틀 집에 바느질을 맡겨 만든 것이었다. 나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헤어지면 깁고 땜질을 해서 신었다.

운동화를 신어 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공책은 지물포에서 종이를 사서 집에서 직접 만들어 썼는데 수업용 공책은 흰 종이를 썼고, 연습장이나 일기장 등은 값싼 갈색 종이를 사용했다.

6ㆍ25전쟁으로 기차가 멈출 때를 제외하고는 졸업 때까지 매일 왕복 14km를 걸어 기차로 통학 했다. 집에서 5km 쯤 걸어 김제역에서 기차를 타고 40분 쯤 지나 익산역에 도착해서는 4열종대로 줄을 서서 통학반장의 호루라기 구령에 맞춰 2km쯤 더 가야 비로소 학교에 도착할 정도로 먼 거리였다.

어머니는 늘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100m쯤 떨어진 마을 우물로 갔다. 거기서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물을 떠다가 부엌 솥가마 옆에 마련한 그릇에 물을 떠놓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두 손으로 빌고 나서 밥을 지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었는데 밥이 늦어 기차를 놓친 적이 없었으니 어머니의 그 정성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지금도 걸음이 빠르다는 얘기를 듣는데 이것은 그 때 어두운 새벽부터 매일 왕복 30리 이상을 뛰어 다니다시피 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50년에 6ㆍ25전쟁이 터졌다. 6월29일 이었던가, 익산역 근처에서 발생한 아군의 오폭에 놀라 기약도 없이 뿔뿔이 헤어진 뒤 거의 1년 가까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집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피난대열도 보고 공산군 통치도 겪었으며 유엔군에 의한 9ㆍ28 서울 수복도 경험했다. 이때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밀고 밀리면서 좌우 쌍방에 의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국군은 제2 국민병으로 젊은이들을 소집해가고 인민군은 또 의용군으로 데려갔다. 한 때는 무턱대고 일터나 길거리에서 잡아가는 일도 있어서 젊은이들이 아예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형제끼리 한 사람은 국군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의용군으로 나간 경우도 많았다. 그 와중에서 나보다 열두 살 위였던 형 박병욱(1924~1950)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

50년 9ㆍ28 수복이 되고 나서 당시 열네 살이었던 나는 집에서 농사일도 하고 자습도 해야 했지만 시국에 동원되는 일도 많았다. 우선 사흘에 한 번씩은 동네 야경을 서야 했는데 이것은 4,5명이 한 조가 되어 하루 밤 동안 동네를 순찰 하면서 지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매주 한번 정도 경찰지서를 지키러 가는 것이다. 당시 지서는 주변에 흙 담으로 된 수 많은 요새를 만들어 놓고 이것을 줄로 연결하여 밤새도록 안전여부를 확인토록 하였다. 그리고 익산~김제 간 도로를 집집마다 20m 정도씩 할당해 놓고 각자 자갈을 구해다가 깔라는 것인데 이것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 부근에서 함께 다닌 기차통학생이 15명 쯤 되었다. 이들은 늘 새벽에 일어나 김제역까지 가면서 하나 둘 씩 합류하여 만나고 또 집에 올 때에도 함께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공산군이 들어 와서 젊은 학생들을 모아 심부름도 시키고 김일성 노래도 부르게 하였는데 우리 통학생 가운데 안기운 안옥 등 여덟 사람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은 대개 고 2,3학년생들이었으며 나는 나이가 어려 여기서 빠졌다. 그런데 9ㆍ28수복이 되자 이들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어 내가 지키러 다니는 경찰지서를 습격하러 온 것이다.

이 지서는 우리 집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져 두 눈으로 바로 보이는 높은 곳에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나는 콩 볶는 듯한 총소리를 들었다. 사연인즉 이들은 경찰지서 점령에 성공했으나 날이 밝아 인근 마을 대숲에 숨어 있다가 이곳을 포위한 경찰에 의해 전원 사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하고 착한 학생들이었다. 철없는 그들 잘못이라기보다 어른들 잘못이었으며 사회의 책임이었다.

결국 15명의 기차통학생 가운데 여덟 명은 이렇게 죽고, 두 사람은 국군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나이 어린 네 사람만 무사히 살아남았는데 나는 그 중 하나였다. 이것이 운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학교가 다시 시작되어 거의 일 년 만에 나가 보니 많은 급우들이 보이지 않았다. 전쟁통에 기차가 다니지 않아 나는 자전거로 다니기도 했고 자취도 해보았다. 51년 9월에 중ㆍ고교가 분리되어 공업중학 4학년이 공고 1학년이 되었다. 학교에는 현역군인들이 배속되어 매주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 또 이런저런 궐기대회에 동원되느라 정상적인 수업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 무렵부터 나는 부모님을 대신해 농사일과 집안일을 더욱 챙기지 않을 수 없어 결석하는 날이 잦았다. 수업료를 제때 못내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때는 시험 때 교문에서 수업료 납부여부를 점검하는 일이 많았다.

수업료를 못내 시험을 못 치고 돌아 갈 때 나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이런 경험이 나를 더욱 성숙시키고 자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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