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오감도'의 3번째 에피소드인 '33번째 남자'는 영화촬영장을 배경으로 두 여배우와 영화감독의 기묘한 관계를 그린다.
이 에피소드 속에서 원하는 장면을 위해 똑같은 연기를 수십 차례나 반복해 찍고, 영화제에서 여러 번 상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는 감독의 이름은 봉찬운.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 지은 것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33번째 남자'를 연출한 유영식 감독이 절친한 세 감독의 이름을 인용한 것이지만 관객 입장에선 한국영화에 드리운 이들의 강한 자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26일 막을 내린 제1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9편의 한국 장편 독립영화를 관람했다. 참신한 발상이 신선했고 주류 상업영화 못지않은 만듦새가 새삼 한국영화의 저력을 실감케 했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했다.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의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져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람의 배를 헤집는 장면이 태연하게 스크린에 투영되고, 목이 잘린 시체 위를 카메라가 지나간다. 근친상간의 아슬아슬한 장면 묘사도 등장한다. 공포와 SF 등 장르영화 잔치를 표방한 영화제라지만 과도하다 싶은 헤모글로빈의 난무이자 이미지의 과잉이었다.
오마주(Hommageㆍ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프랑스어)인지 모방인지 구분이 안 가는 행태는 최근 충무로에서도 반복된다. 스릴러와 범죄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비 내리는 갈대밭 장면은 '살인의 추억'의 변주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를 휘어잡은 '세리 키즈'처럼 영화계에도 '봉준호 키즈'와 '박찬욱 키즈', '김기덕 키즈'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빈약한 화술을 바탕으로 선배 감독들이 이미 구축한 이미지의 세계를 질세라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국의 세계적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는 점심시간에 이른바 '픽사 유니버시티'라는 강의를 개설한다고 한다. 직원을 대상으로 한 강의 시간 대부분은 '이야기'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데에 할애된다.
수려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 기술에 있어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그들이, 영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이야기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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