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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5> '말짱 헛일이다'에 도전한 군대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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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5> '말짱 헛일이다'에 도전한 군대생활

입력
2009.07.27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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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랑은 팔불출의 으뜸이라고 한다. 자랑은 하는 순간 수치가 된다. 이러니 자랑의 역설을 명심할 일이지만 꼭 자랑하고픈 일이 있다. 나의 지난 일을 쓰지 않는다면 모르되 쓴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군대생활을 멋있게 했다. 물론 가치관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군대란 본질적으로 반문명적인 데다, 동족 대결의 상황에서 군대는 필요악일 것이고, 내가 참전한 월남전은 대의명분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탈법이 예사인 군대생활에서 원칙을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 했고, 내게 주어진 임무는 꼭 해냈다는 점에서 더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1967년 2월 군에 입대했다. 당시 서울법대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군법무관으로 입대하거나 졸업 후 장교로 입대했고, 심지어 입대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으로 사법시험을 단념한 데다 학생운동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고 있어 개인 사정으로도 군 입대를 주저할 이유가 없었지만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신병훈련소에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 있는데, '군대에서 배운 것은 말짱 헛일이다'였다. 육군통신학교에 가서도 이 말을 수 없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청춘기 3년을 '말짱 헛일'로 보내는 것은 시간낭비 이전에 내 인생의 수치였다. 그래서 '말짱 헛일'이 안 되게 할 생활 신조를 정했는데, '나는 나다(I am I)'와 '하라, 그러면 된다(Do, and be done)'였다.

육군통신학교를 수료하고 군수기지사령부 통신 근무대에 배치됐는데, 한 달 뒤 월남파병을 명령 받았다. 월남전 초기라 위험하다고 돈을 써서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월남파병을 반대한 일도 있어 내키지는 않았으나 국가정책으로 결정된 이상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월남에 가기로 했다.

휴가를 받아 서울에서 조영래를 비롯한 친구들과 회식을 했는데, 다들 나의 월남행을 반대했다. 명분 없는 전쟁이고 죽을 수도 있는데, '왜 개죽음을 하느냐'는 거였다. 회식이 끝나고도 조영래는 나를 붙들고 기어이 못 가게 말렸다. 뒷날 그는 이때의 일을 한겨레신문에 쓴 바 있다.

부산 제3부두에서 월남행 LST함에 오르기 전 환송식이 있었다. 여군 합창단이 '아아 잘 있거라 부산항구야'를 부르는데, 과연 또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8월 말 월남에 도착해 백마 29연대 배속 51포병부대 경비소대에 배치되어 낮에는 포탄을 나르거나 벙커를 짓고 밤에는 보초를 서거나 매복을 나갔다.

매복은 위험하기는 했지만 월남인들과 어울릴 수 있어 재미있었다. 월남 근무 두 달쯤 되던 '유엔데이' 밤에 박격포탄 수십 발이 부대 안에 떨어져 포대장을 비롯 몇몇 병사가 크게 다쳐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구정 공세'로 유명한 베트콩의 총공세가 있어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선도 없고 전장도 없었지만 언제 당할지 모르는 것이 월남전이었다. 특히 월남 주민들은 끊임없이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다. 온 산이 단풍 빛으로 물들 정도로 포탄을 쏘는 데다 밤 8시엔 일제히 기총 사격을 해대어 부대 앞 주민들은 샌드백에 의지해 생활했다.

참으로 평화로운 땅이고 순박한 사람들인데도 전쟁이 생활처럼 되어 있어 너무나 안타까웠다. 우리 부대에서 근무하던 월남인 찌나 수엉과 자주 대화를 나눴는데, 전쟁이 없기를 바랄 뿐 전쟁이 없게 할 수는 없는 민초들의 한이 안쓰러웠다.

나는 결국 월남에서 고엽제 질환을 얻었는데, 그 당시는 알레르기성 피부질환인 줄로만 알았을 뿐 그런 병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1년 만에 월남근무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같은 배로 귀국한 부관참모가 월남에서 고생했으니 후방으로 배치해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하고 강원도 화천에 있는 27사단 79연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월남전 참전으로 병장진급이 빨라 전입 후 곧바로 내무반장이 되었다. 청소는 말할 것도 없고 후임병들의 관물정리까지 해주면서 내무반 분위기를 일신했다. 일주일에 약 20명씩 신병이 들어오는데 후방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래서 점호 후 "너희들 후방으로 빼달라고 부모님한테 편지 쓸 생각이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빠져나갈 수도 없고 빠져나갈 필요도 없다. 여기가 후방보다 낫다. 사나이가 군에 왔으면 군인답게 전방에서 근무해야지 졸장부같이 후방으로 가려 하느냐"고 훈시를 해 신병들을 안심시켰다.

'김신조 사건' 후부터 완전군장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5Km구보를 했는데 빠지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빠지려다 못 빠지면 더 힘드니 아예 빠지려 하지 말고 배낭끈 잘 묶고 식사량 줄여 잘 뛰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거기서 나는 원칙대로 사는 것이 가장 편한 길임을 절감했다.

3선 개헌 때 통신과장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코 반대란에 기표했다. 밤늦게 술에 취한 통신과장 김 대위가 비상을 걸어 전원 집합시키고는 "장기표 이 새끼 무엇이 그리 잘 났다고 혼자 반대냐"면서 주먹으로 때리려 해 도망갔는데, 다음 날 별일 없이 넘어갔다. 훈련 때 P10 무전기를 메고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통신을 완벽하게 해낸 덕분이었다.

제대를 한 달 남겨두고 유격훈련을 받았다. 훈련보다 기합이 더 힘든데, 다른 기합은 다 받아도 원산폭격은 받을 수 없어 버텼더니 교관실로 끌고 갔다. 제대 말년임을 알고는 훈련 때 쉬라고 했다.

이날 밤 텐트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올빼미 체조 거기서 쓰러지고, 레펠 거기서 떨어지고, PT체조 거기서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내 신조를 어길 수는 없다. 섣달이면 영광의 제대인데 유혹의 길을 걸을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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