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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친정 엄마에겐 안쓰는 물건 좀 버리라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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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친정 엄마에겐 안쓰는 물건 좀 버리라던 나

입력
2009.07.27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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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가면 몇 달 전에 보았던 비닐봉투에 생선이며, 고기들이 그대로 있을 때도 있고, 심지어 제가 어릴 적 덮었던 밍크담요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항상 저는 "엄마. 좀 버리세요. 버려야 들어온대요. 이렇게 좁은 집이 꽉 차 있으니 복이든 돈이든 어디로 비집고 들어오겠어요" 하고는 냉장고가 텅 비게 거리낌없이 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을 보니 남의 말 할 때가 아니더군요. 심지어는 중학교 때 읽었던 동화책이며 대학시절에 정리해 놓은 요점노트까지 그대로 책꽂이에 있는 게 아닙니까? 항상 버리려다가 "조금만 더 두지 뭐. 저것 없어진다고 좁은 집이 넓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던 것들이었습니다.

주객이 전도 된다고 그것들이 모여서 정작 최근에 산 책이며 물건들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해 한쪽에 쌓여져 있더군요.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그 동안 마음을 어지럽게 누르던 안 쓰는 물건들을 치우기로 했지요. 그렇게 나의 집 정리는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너희들. 그 동안 안 쓰고 쟁여 놓은 것들 다 버려. 특히 책상 서랍에 크레파스며, 색종이들 다 버려" 라고 엄포를 놓고는 먼저 책꽂이부터 헤집었습니다.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가 되어있는 책이며, 가만히 보니 책벌레가 곰실곰실 기어 다니는 낡은 책들을 하나하나 빼고 보니 어느새 책꽂이에 빈자리가 생기더군요. 그때 책갈피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메모지 한 장. 그것을 본 순간 점점 제 손길은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직까지 이 낡은 책이나 작은 종이쪼가리를 버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추억이었습니다. 내 젊은 날의 열정과 탐닉... 그 한 줄 한 줄의 메모와 남편에게서 왔던 정열적인 연애편지를 보니 새삼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이렇게 가슴 설레던 시절이 있었지. 멋진 시 한 소절에 눈물 흘리던 시절이..."

지금은 저녁을 먹고 온다면 더 반가운 남편이 보고 싶어,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면회를 갔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남편의 구리 빛 얼굴이 참 멋져 보였었는데...

결국 저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다시 헌 책들을 책꽂이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뭔가를 정리하려는데 앨범이 눈에 띄더군요. 요즘엔 디카가 있어, 종이사진을 출력하지 않고 컴퓨터에 저장해, 자리를 차지하지 않지만, 예쁜 사진은 다시 빼 보겠다고 필름까지 안 버리고 그대로 봉투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앨범은 귀퉁이가 찢어져서 앨범으로서의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책꽂이만 잔뜩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손이 빨라졌습니다. 시작을 했으니 앨범이라도 정리하자 싶었지요. 디카 시절에 색이 바랜 필름사진은 참 초라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그것들을 죄다 휴지통으로 보내고, 비슷비슷한 사진들도 대충 정리해서 앨범 개수도 좀 줄이자 싶어 사진들을 꺼내려다 잠시 멍하니 있고 말았습니다. 이 사진을 언제 찍었을까? 친정 집 이었고 10명도 넘는 식구가 제각기 포즈를 취하면서 웃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저는 참 젊었고, 그 옆에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아빠가 계십니다. 아빠가 살아계실 적 사진이면 벌써 10년이 지난 사진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사진 속의 인물들 중 3명이 벌써 우리 곁에 없는 사람들이더군요. 아빠가 그러하시고, 동생과 이혼한 제부가 그렇고...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 제부에게 뺏긴 3살 먹은 조카가 그러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을 때가 있었지." 이들 때문에 이렇게 행복하게 웃었을 때가 분명 있었고 이들의 빈자리에 하염없이 슬플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벌써 이 사람들을 죄다 비운 것일까? 갑자기 마음이 썰렁해지면서 가난뱅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결국 나의 비우기는 거기에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엄마처럼 비우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추억을 버린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작은 옷가지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나보다 더 추억에 연연해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벌써 나도 추억이 소중하고 그것들을 버리기 싫은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좁은 집보다 추억이 사라진 집이 더 싫은 것을 보니 말입니다. 싹 버리겠다고 오전 내내 집을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결국 제자리로 다시 찾아 들어가는 물건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엄마! 뭐예요~ 필요 없는 것은 좀 버리세요" 라고 합니다.

내가 엄마께 했던 말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듣는 것이죠. "이것들아! 엄마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이제는 새것보다는 추억이 묻어나는 것이 더 좋구나. 너희들이 엄마의 변덕을 좀 이해해 줘야겠다."

광주 남구 노대동 -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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