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직원, 재미동포 대학생, 학원 강사, 유명 미대 출신 할머니…. 서울 종로경찰서 광화문지구대 최수용(43) 경사에게 걸린 책도둑들이다. 그는 지난 4월부터 종로 일대 대형서점 3곳을 돌며 책도둑을 전문으로 잡고 있다.
그에 따르면 '책도둑은 대개 가난한 학생들로, 도둑도 아니다'는 통념과는 달리,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해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이 대부분이다. 책도둑이 더욱 활개치는 방학 시즌, 최 경사를 통해 책도둑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지난달 27일 A문고에서 책을 훔치다 붙잡힌 강모(31ㆍ여)씨는 굴지의 공기업 직원이었다. 그가 훔친 책은 미국의 대표적 진보학자 노암 촘스키가 권력에 맞서 싸운 지난 10년의 투쟁을 정리한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 강씨는 검거 당시 책 수 십 권을 살 수 있는 50여만원 어치의 상품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최 경사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세상의>
유명 미대를 졸업한 이모(67ㆍ여)씨는 <아랍어 첫걸음> 등을 훔치다 적발됐다. 서울 여의도의 아파트에 사는 그는 "중동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가기 위해 아랍어를 배우려 했다"고 말했다. 외국 원서를 몰래 가방에 담고 한 손엔 군것질거리를 든 채 태연하게 서점을 빠져나가려다 적발된 김모(24ㆍ여)씨는 재미동포로 미국 유명 대학 재학생이었다. 아랍어>
서울 이태원동의 165㎡(약 50평) 규모 복층 빌라에 사는 유모(47ㆍ여)씨는 하루에 29만원어치를 훔칠 정도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쓸어담다 적발됐다. 그는 책 이름이 적힌 쪽지를 들고 매장 매니저에 책 위치를 묻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유씨의 집에는 훔친 책 200여권이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지방의 학원강사 변모(41)씨는 사회과학 서적만 집중적으로 훔친 경우다. 지난 8일 검거 당시에도 수첩에 훔칠 책 목록을 빼곡히 적어와 <꿈의 세계와 파국> , <불확실한 삶> , <대중들의 공포> 등 6권을 훔쳤다. 대중들의> 불확실한> 꿈의>
그는 이전부터 서울로 '책도둑 원정'을 와 사회과학 서적 37권을 훔쳤다고 실토했다. 음악관련 일을 하는 정모(35)씨는 지난 3년간 빨간색 배낭에다 <슈만작품4집> <골드베르크변주곡> 등 클래식음악 서적만 전문적으로 담았다. 골드베르크변주곡> 슈만작품4집>
최 경사는 "이들은 책도둑은 큰 죄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 두 번 책을 훔쳤다가 들키지 않자 점점 도둑질에 빠져 든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뻔뻔한' 도둑들 외에 최 경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책도둑도 있었다. 박모(41ㆍ여)씨는 친정에서 돈을 끌어다 남편 사업자금을 댔지만 부도로 친척들마저 등을 돌려 거리로 내쫓긴 노숙자였다.
박씨가 훔친 책은 <그대를 사랑합니다> , <사랑해> , 그리고 찬송가 1권이었다. 최 경사는 "청소년들은 훈방을 원칙으로 한다"면서도 "수십 권씩 상습적으로 훔치는 책도둑을 '제복'을 입은 사람으로서 봐줄 순 없다"고 말했다. 사랑해> 그대를>
장재용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