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한 날치기 조종자', '날치기 공조 지휘자'. 미디어 3법 강행처리에 반발, 민주당 대변인실이 어제 김형오 국회의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각각 비난한 말입니다. 날카로운 가시만 빼면 강행처리 과정을 제법 잘 요약했습니다.
두 분이야 대수롭지 않겠지요. 어차피 야당은 소수자의 특권인 독한 말을 쏟아내겠지만, 거기에 귀를 기울일 국민은 많지 않을 테니까요. 아니, 두 분은 차분하게 말로써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막장 국회에서 보기 드문 '신사' '숙녀'로 통하니, 그런 막말에 털끝만큼도 신경이 쓰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한바탕 육탄전이 펼쳐진 본회의장에 두 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판이 험해서 점잖고, 우아한 분들이 발길을 옮길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엉성한 강행처리 직후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재투표' 효력이나 '대리투표' 여부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며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점잔과 우아 참 좋죠?
김 의장은 지난해 12월에 미디어법이 제안된 이래 여러 차례 최종 협상시한을 통보하며 여야의 합의를 촉구했습니다. 또 합의 불발에도 불구하고 끝내 직권상정만은 보류했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여당의 직권상정 요청을 수용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여당과 이어졌더라도 제도적으로는 독립된 의장께서 여당 내부의 '최종 시한'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박 전 대표가 최종 수정안에 대해 "그만하면 국민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밝혔듯, 법안 내용이 일정 기준을 충족한 반면 더 이상 야당의 태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기에 내린 결단일 겁니다. 그런데 왜 사회봉을 잡지는 못했나요?
짐작은 합니다. 당장 야당의 봉쇄망을 뚫으려다가는 점잖은 체면에 금이 갈 것인 데다 강행처리의 주역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자세는 최종 수정안에 대한 인식과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윤성 부의장의 서툰 사회가 빚은 법적 논란을 감안하면 무책임하게 느껴집니다.
직권상정을 수용할 정도로 최종 수정안에 자신이 있었다면, 질서유지권과 경호권으로 제대로 물리적 방해를 물리치고 본회의장을 정상화했어야 합니다. 시대 상황이 다르면 같은 행위도 달리 평가되는 법이지요. '독재' 운운하기가 낯이 간지러운 이 시절에 불법적 의사당 폭력을 합법적 수단으로 막는다고 비난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직접 사회를 봤다면 절차문제를 둘러싼 지금의 법적 논란은 없었을 겁니다.
혹시라도 수정안에 자신이 없었다면 직권상정을 수용하지 말았어야지요. 의장께서는 '큰 뜻'을 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도자는 소신을 굳게 밀고 나갈 용기가 있어야 하고, 거꾸로 미심쩍으면 물리쳐야 합니다. 적당히 넘어가며 악역만 피하고 보자는 작은 지혜는 상거래라면 몰라도 '큰 정치'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박 전 대표께도 마찬가지 의문을 느낍니다. 스스로의 제안이 대부분 수용돼 '박근혜 법안'이라고까지 불린 법안이 처리되는 장면을 원내 대표실에서 우아하게 TV로 지켜보았습니다. 야당의 봉쇄망이 두렵거나 귀찮았나요? 조금만 용기를 냈다면 "국민도 이해할 것"이라는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 믿음을 끌어냈을 겁니다.
소신과 용기를 보여야
과거 칼에 베인 얼굴을 손수건으로 누른 채 "대전은요?" 하고 묻던 때의 '낮은 자리의 용기'는 다 어디로 간 겁니까? 상처는 남았는데 이제는 구름 위에서 땅바닥으로 내려설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군요. 박 전 대표는 미디어법 논란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고, 새로 많이 챙기기도 했습니다. 최종 승자라는 평가도 그저 나온 게 아닙니다.
박 전 대표는 많은 국민에게 '공주'였습니다. "대전은요?" 사건으로 비로소 땅에 발을 디딘 정치 지도자로서 국민에게 다가섰고, 그것이 현재의 정치적 신망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미디어법 강행처리 이후 자꾸만 다시 구름 위로 올라가려는 박 전 대표의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헛것이 뵈는 걸까요?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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