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두께 3㎝가 꿈이라구?…불가능 벽 넘은 삼성 LED 혁명
“두께가 3㎝인 TV를 개발하라고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게 어딨어? 3㎝가 아니라 3㎝미만이야. 해 봐.”
2007년7월 경기 수원시 매탄동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센터 5층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송영란 수석은 김현석 전무의 지시에 그만 울음보를 터뜨릴 뻔했다. 통상 10㎝가 넘는 LCD TV의 두께를 3㎝ 미만으로 줄인다는 것은 몸무게 100㎏인 사람이 살을 70㎏ 이상 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서는 송 수석의 등에 김 전무는 한 마디 더 붙였다. “누구라도 살 수 있는 TV여야 하는 거 알지? 가전쇼 출품용이 아니라 판매용이라고.”
이렇게 시작된 LED TV 개발 프로젝트는 처음 6개월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원점에서 맴돌았다. 송 수석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방법들을 실험해보면서 결국 이런 방식으론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제품을 창조해야 하는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통과의례였다.
그러나 해 보지 않았을 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화면 뒤에서 빛을 비춰주는 발광체로 형광등을 사용하는 기존의 방식은 형광등 두께만으로도 3㎝를 넘어 검토에서 배제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LED다. 그러나 LED는 비싸다. 기존 방식대로 화면 뒤에서 쏴 줄 경우엔 필요한 LED의 수가 너무 많아 가격대가 높아진다. 만들 수는 있지만 팔 수는 없다. 이런 고민 끝에 나온 묘책이 LED를 TV 화면 위아래 뿐 아니라 좌우 테두리에도 배치함으로써 충분한 빛의 양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LED의 빛을 90도로 꺾어 정면으로 다시 비춰주는 렌즈의 일종인 도광판(導光板)이 두꺼워질 수 밖에 없다. 수십번의 실패 끝에 아크릴 판에 섬세하게 설계 된 렌즈를 인쇄하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도 해결했다.
지난해 7월 가능성이 보인다는 보고를 받은 김 전무는 곧바로 전체 연구인력 2,000명을 호출, 상품화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했다. 패널, 회로, 기구(機構), 외관 등의 4개 부문별로 개발팀이 확대됐다. 처음엔 3㎝를 놓고 각 부문별로 더 많은 두께를 할당받기 위한 실랑이도 벌어졌다. 한 치(3㎝)의 양보는커녕 한치의 100분의1도 빼앗겨선 낭패였다.
상품화 과정은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먼저 도광판 소재가 말썽을 피웠다. 온도와 습도에 민감해 ‘물먹는 하마’로 불리는 아크릴 판을 쓴 게 화근이었다. 전 세계에 걸쳐 팔릴 제품이라면 극한 온도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하는데 아크릴 판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 개발팀은 전 세계 사업부에 연락, 가장 혹독한 기상 조건 등을 뽑아 달라 요청했고, 이렇게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북극에서조차 견딜 수 있는 도광판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드디어 완성인 줄 알았던 올해초 또 다시 문제가 터졌다. 55인치나 되는 대형 TV가 너무 얇다 보니 일부 휨 현상이 발생했다. 제품 출시까지 남은 기간은 단 두 달. 이때부터 밤 12시 이전에 퇴근하는 날이 사라졌다. 직원들은 간이 수면실에서 2,3시간씩 새우잠을 번갈아가면서 마무리 작업을 펼쳤다. 일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갈아입을 옷을 챙겨오기 위해 잠시 집에 다녀오는 날로 바뀌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3월, LED TV가 출시됐다. 숨죽이며 시장의 반응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통업체들이 LED TV를 서로 더 달라고 요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 출시 6주만에 20만대 판매, 100일만에 50만대 판매 돌파라는 낭보가 전해졌다. 개발팀에서 회로 부문을 맡았던 김광연 수석은 21일 “그 동안의 고생이 보람으로 돌아왔다”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 본 만큼 이젠 어떤 일이라도 자신 있다”고 말했다.
수원=박일근기자 ikpark@hk.co.kr
■ 삼성전자 LED TV 대박 비결은
삼성전자 LED TV가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와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출발점은 소비자였다. 개발팀을 맡은 김현석 삼성전자 전무는 "LCD TV나 PDP TV를 흔히 '벽걸이 TV'라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벽걸이 TV는 너무 두껍고 무거워 벽에 걸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전세 세입자는 물론 집주인도 벽이 상할까 봐 걸 수 없다는 민원이 잇따랐다. 시장에선 액자처럼 정말 벽에 걸 수 있는 TV를 요구했다. 특히 두께를 3㎝ 이하로 줄이면 가격이 700달러 가량 비싸도 구매하겠다는 소비자 조사결과까지 나오면서 김 전무는 개발 첫 번째 목표를 '얇은 TV'로 잡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지금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자칫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소비전력. 가격은 더 비싸도 전기를 덜 먹는 만큼 오래 쓰면 이를 상쇄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 실제 삼성 LED TV의 소비 전력은 LCD TV의 60% 수준이다.
그러나 개발팀이 가장 내세우고 싶은 것은 화질이다. 김 전무는 "TV는 누가 뭐라 해도 역시 보는 것"이라며 "세계 최고의 화질을 구현하기 위해 화질 개선 시스템 반도체를 자체 개발했다"고 밝혔다. 그는 "전 세계 TV 업체 중 딱 두 곳만 자체 칩을 갖고 있다"며 "전체 개발인력 2,000명의 25%인 500명이 이 칩을 개발하는 데 매달렸다"고 소개했다. 바보상자 TV가 시스템 반도체 칩 장착으로 두뇌를 갖게 됐다는 설명이다.
삼성에 따르면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2006년 "집안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가장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TV"라며 세계 최고의 TV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당시 윤종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디지털 TV 일류화 태스크포스가 출범했고, 시스템 반도체 사업부를 주축으로 연구소와 계열사 박사를 포함한 그룹 차원의 드림팀이 구성됐다. 그리고 2008년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삼성전자 TV 제품에 장착할 수 있는 화질 개선 칩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진입 장벽을 구축한 셈이다.
마케팅 전략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단 새로운 차원의 TV임을 강조하기 위해 'LED TV'라는 명칭을 내세웠다. 그리고 거래선인 유통업자들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마케팅 담당인 전성호 상무는 유통업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기존 TV와는 전혀 다른 제품임을 역설하고 진열대를 따로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소비자는 자연스레 LED TV와 기존 벽걸이 TV를 비교하게 됐고, 다소 비싸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LED TV를 선택했다. 유통매장에서 공간은 돈이다. 유통업체들이 삼성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 상무는 "삼성전자 LED TV때문에 매장 방문객이 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거래선 반응이 좋다"며 "연말까지 200만대 판매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박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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