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해운대'의 언론 시사회를 앞두고 윤제균 감독이 던진 한마디. "'해운대'는 '쓰나미만 있는' 영화가 아니다. '쓰나미도 있는' 영화다." 윤 감독은 조심스레 말했지만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전한 자신감은 충분한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케팅비 등을 제외하고 순제작비 130억원을 들인 '해운대'는 웃음과 감동과 볼거리를 영리하게 배합한, 썩 잘 빠진 블록버스터다.
재미난 에피소드들만 모아 얽은 듯한 단순한 서사 구조와 평면적인 캐릭터가 이 영화의 존재가치에 회의를 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울리고 적당히 눈을 즐겁게 해줄 여름 영화를 기다린 관객이라면 본전 생각은 들지 않을 듯하다.
■ 웃음이 물결 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들에게 처음 밀려드는 것은 윤제균식 유머가 깃든 웃음의 물결이다. 여자 삼수생 김희미(강예원)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남자가 던진 구명튜브에 머리를 맞고 기절하는 장면, 해양구조대원 최형식(이민기)이 구조를 위해 희미의 머리를 잡아 끄는 장면부터 웃음보가 터지기 시작한다.
웃음의 절정은 최만식(설경구)이 이끈다. 만식이 빨대로 소주를 마시다 끝내 취기를 못 이기고 그라운드까지 내려가 롯데자이언츠 4번 타자 이대호에게 연신 이죽대는 모습은 관객들의 굳은 얼굴을 일거에 허물어뜨리기 충분하다.
부산 시민이라면 더욱 박장대소할 장면이다. 만식이 숙취를 못 견디고 자다 깨서는 1회용 샴푸를 '겔포스'로 오인하고 복용한 뒤 입에 거품을 무는 연기는 관객들의 눈가에 아예 주름을 새긴다.
■ 인간애의 파도가 밀려온 뒤
윤 감독은 사석에서나 촬영현장에서나 개인의 능력보다 인간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영화인. 그가 영화 속에서 인간애를 어떻게 그려낼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조폭 간부지만 불의 앞에서 분기탱천하는 계두식('두사부일체')과 철거민을 쫓으려다 그들 편에 서게 된 날건달 필제('1번가의 기적')의, 성선설에 해당할 만한 다분히 인간적인 모습은 '해운대'에서도 변주된다.
5년 전 동남아의 쓰나미 현장에서 선장을 잃은 만식과 선장의 딸 연희의 인간미 넘치는 사랑, 거대 쓰나미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딸의 재회, 만식이 "개XX"라 일갈할 정도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만식 삼촌(송재호)의 참모습, 사고뭉치 오동춘(김인권)의 미워할 수 없는 심성 등이 감동의 파도를 일으킨다.
여기에 형식과 희미의 청초한 사랑이 겹치면서 재난 앞에 무너져내리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행복이 비장미를 더한다.
■ CG의 쓰나미가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컴퓨터 그래픽은 기대 이하도, 기대 이상도 아니다. 시속 800㎞로 내달려 해운대 일대를 박살내는 거대 쓰나미는 할리우드 물CG의 일인자 한스 울릭에 의해 빚어진 점을 감안하면 다소 실망스럽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컴퓨터 그래픽이 엉망"이라는, 충무로에 오래도록 떠돌던 '해운대 괴담'과 달리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정작 '해운대'의 스펙터클은 거대한 쓰나미에 있지 않다. 거리에 몰아닥친 해일 때문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밀리고 내팽개쳐지고 감전당해 물에 둥둥 뜨는 모습 등에서 재난영화로서의 공포와 서스펜스는 극대화된다.
디지털 작업인 CG에 의지했음에도 역설적으로 성실한 연출과 꼼꼼한 편집이라는, 아날로그의 묵직한 힘이 전해진다. '팝콘 무비'(시간때우기용 영화)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만듦새를 마냥 무시할 수 없게 하는 최고의 미덕이다. 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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