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청사 4층 중회의실. 외국인 등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지만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서울가정법원의 외국어 통역 자원봉사자로 뽑힌 이들이 위촉장을 받는 날이었다.
자원봉사자는 영어 31명, 중국어 31명을 비롯해 일본어, 베트남어, 몽골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태국어, 말레이시아어, 포르투갈어 등 12개 국어, 102명에 달한다. 이들은 외국인 또는 이민자들이 이혼 등 가사 소송을 불편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무료로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6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위촉장을 받은 뒤 '법률 교육'을 받았다. 이명철 공보판사가 맡아 오전과 오후 2시간 가량 진행된 교육은 소송 절차에 대한 설명과 소송과 비송(非訟) 사건, 기각과 각하의 차이 등 법률용어 풀이가 이어졌다.
강의를 경청하던 자원봉사자들은 간혹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아무리 풀어 설명해도 낯설고 딱딱한 법률용어가 귀에 쏙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중국동포 안염명(安艶明ㆍ여ㆍ55)씨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톄링(鐵嶺)시 법원에 재직 중인 판사다. 그는 24년간의 판사 생활을 마치고 9월 퇴임식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한국 법원에서, 그것도 급여도 없는 자원봉사자로 새 삶을 시작하려는 까닭은 뭘까. 안씨의 답은 짧지만 명쾌했다. "한국이 좋으니까요. 중국에서 살면서도 항상 한국이 제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여느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려서부터 집에서 한국어를 썼다.
그러면서 막연하게나마 가졌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부친의 돌연한 죽음을 계기로 부쩍 깊어졌다. "아버님이 일제 때 고향인 경남 합천을 떠나 만주에서 한약상을 하셨어요. 고향에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셨는데, 한중수교(1992년) 직전 돌아가셨죠."
양국의 수교로 왕래가 자유로워진 뒤 안씨는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다. 처음에는 판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혹시 중국 공산당원인 게 드러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까, 걱정한 탓이다.
그는 아버지 대신 모국 땅을 둘러보며 "언젠가 한국에서 터 잡고 살겠다"고 결심했고, 공직 생활을 다 마친 지금 대를 이은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선양(瀋陽)에 있는 남편도 그런 그의 선택을 받아들여 당분간의 '이별'을 허락했다. 한국에서 먼저 일터를 잡은 언니 둘은 이미 귀화를 했고, 셋째인 안씨는 귀화 절차를 밟고 있다.
안씨는 한국에 정착해 할 일을 찾다가 통역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중국 법원에서 사회적 약자인 중국동포들이 법적인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언어 문제가 있으나 더 하겠죠. 한족들도 그렇고요. 제가 한국어도 할 수 있고 법률 지식도 있으니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안씨와 함께 통역 자원봉사자로 활동할 부티련(29ㆍ여)씨는 2007년 베트남에서 시집 온 결혼 이민자다. 하노이 소재 대학에서 영문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재원(才媛)이다. 베트남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를 하다가 한국에서 여행 온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아직 한국말이 완벽하진 않지만 가정 문제로 딱한 처지에 놓인 베트남 이주 여성들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나서게 됐다. "문화적 차이와 언어 장벽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주 여성들이 많아요. 한국인 남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봤고요. 제가 한국 정착 초기에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베트남 이주 여성들을 돕고 싶어요."
각오는 남다르지만 아무래도 생소한 법률 용어를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는 "요즘 남편의 도움을 받아서 한국 법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몽골 출신인 오랑거(19ㆍ여)씨는 이번에 위촉된 자원봉사자들 가운데 가장 어리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어서 말과 법률 지식 모두 탄탄하다. 그동안 경찰서 등에서 몽골인 동포들을 위해 통역 활동을 한 경험도 풍부하다.
이들은 앞으로 외국인이나 이민자들이 소장을 쓰는 단계부터 재판과 가사조사, 합의, 협의 이혼 등 모든 과정에서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영어와 중국어 자원봉사자는 1명씩 상주하고, 다른 언어는 법원이 필요할 때마다 자원봉사자를 불러 도움을 청한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 및 결혼 이민이 늘면서 이들이 관련된 소송도 크게 늘어 서울가정법원에 접수되는 재판 이혼 건수만 월 300건이 넘는다. 그러나 그동안 가정법원에는 자체 통역 없이 서울중앙지법 형사재판부의 통역 풀을 활용해 불편이 컸다.
가정법원은 자체 통역 인력을 확보한데다, 자원봉사자 대부분이 '고급 인력'들이어서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명철 판사는 "모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분들이 많아서 통역의 정확성이 더 보장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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