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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프랭클린, 여의도 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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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프랭클린, 여의도 온다면

입력
2009.07.2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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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가을 어느 날 파리의 한 살롱.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당대의 지성이자 첫 미국 대사로 파리에 온 벤자민 프랭클린에게 약관의 변호사로 훗날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 혁명가 조르주 당통이 도발적인 질문을 한다.

질문의 취지는 이랬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침해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런 권리들을 향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부를 구성했으며, 정부의 권위는 국민의 동의에 의해 합법적이 된다, 정부가 처음의 목적에서 멀어지면 국민은 새 정부를 세울 권한을 갖는다…이런 내용을 담은 미국 독립선언서는 훌륭하다…그러나 세상은 불의와 비참함으로 가득하다, 이런 세상에서 선언이 제대로 지켜지려면 사법적, 군사적 제재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미 독립선언서에는 그게 없지 않느냐.

프랭클린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 선언서에는 막강하고 영원한 권력이 버티고 있다, 바로 수치심의 권력(the power of shame)이라고.

사전을 보면 수치(羞恥)는 부끄러움이고 수치심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수치는 대단히 중요한 제재고 형벌이다. 프랭클린은 독립선언서를 지키지 않을 경우 수치스러운 자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기에 사법적 제재가 없어도 된다는 답을 한 것이다. 마치 천박한 우문(愚問)에 고매한 선비들이 툭 던진 우아한 대구(對句)를 연상시킨다.

지금 우리가 프랭클린을 여의도로 모셔와 한 말씀 듣는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노인네로 치부될 것이다. 여의도에는 수치라는 단어가 없어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미디어법을 둘러싼 난장(亂場)을 한 번 보자. 일단 여권 수뇌부는 비장하다. 이게 안 되면 나라가 결단 날 것 같다. 그런데 적지 않은 여당 의원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사석에선 "무슨 필(feel)이 꽂혀서 이 난리를 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자탄이 나온다. 급기야 대중적 지지가 높은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지도부는 '고(GO)'다. 더 나아가 김형오 국회의장조차 역대 국회의장들이 재임 중 한 번 할까말까 하는 직권상정을 이미 3차례나 했는데도 또 다시 미디어법 직권상정을 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고 있다.

자기 식구들조차 미심쩍어 하는 법안을 직권상정해 강행처리하겠다는 것은 순리나 논리,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후안(厚顔)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미디어법의 중요한 근거가 됐던 보고서가 오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했으면서도 "그래도 해야겠다"고 단언하는 태도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몇 달 전 이른바 입법전쟁 때 국회 회의실 문을 해머로 쪼갠 야당 의원, 분사기로 쏘며 막는 여당 의원을 보며 세상은 개탄했다. 개탄해야 마땅한 수치심 없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행동보다 더 문제인 것은 말이다. 적어도 지성사회에서는 그렇다. 몇 년 전 공직자들의 재산문제나 흠결에 철저한 검증, 가혹한 비판을 가하던 사람들이 요즘 갑자기 침묵한다든지, 출총제 폐지나 금산분리 완화, 법인세ㆍ소득세 인하만 이루어지면 엄청나게 투자하겠다던 재벌들이 다 해주었는데도 여전히 투자를 안 하면서 상속세도 낮추라고 요구하는 현실에서 수치심을 무겁게 말한 베자민 프랭클린이 구천에서 수치스러 워할까봐 우리가 수치스럽다.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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