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45)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 발행)는 '시인으로 살기'에 대한 고뇌로 가득차 있다. 등단 19년차, 중년에 접어든 시인에게 시쓰기의 어려움이란 더욱 뼈져리다. 자본의 씨앗이라는 돈, 그것을 벌어야 하는 속(俗)의 세계와 영혼의 씨앗이라는 시를 키우는 성(聖)의 세계에서 줄다리기하는 그녀가 발디딘 곳은 어떤 곳인가. 포도알이>
그곳은 '불멸을 꿈꾸었던 시인은 이미 세상을 등지고/ 지리멸렬을 살아내는 몸의 안녕이 일말의 마음속 불멸마저 사그라뜨리는, 더 이상 정신의 존엄과 영혼의 위대함이란 로망이 없는 세계'('더 이상 로망은 없다')이다.
시에 대한 젊은날의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씁쓸한 자조다. 시인은 스스로를 '한시절 흘려보낸, 어느덧 한물간, 가수'('직박구리의 귀')라 읊조린다. 그러나 자조는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힘이 된다.
시가 개인적이고 사변적인 관심에 머물러왔다는 시인의 자기반성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전화됐다. 그것은 힘없고, 죽어가는 것들을 눈여겨보는 일이다. 강제 철거당해 목을 맨 붕어빵 노점상('라라 파비안의 아다지오')이거나, 유괴범에 희생된 아이들('판의 미로') 혹은 위암에 걸려 꼬챙이처럼 마른 할아버지('불쌍하고, 불쌍하다') 같은 이들로 향한다.
시집의 마지막 시 '21세기 시론'에는 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나지막하지만 절절한 시인의 육성이 담겨있다. '내 시가 커다란 울림을 갖지 못해서/ 불쌍한 한 사람이 다른 불쌍한 한 사람을 해쳤다… 내 시는 계속 씌어지리라, 오래, 씌어져서/ 삶의 거친 나뭇결을 문지르는 사포가 되고/ 그 사포의 리듬을 따라 읊조리는/ 나지막하지만 끊이지 않는 허밍이 되리라'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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