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에서 역동성의 원동력으로 평가 받던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도리어 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는 원흉으로 전락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17일 보도했다. 경기침체가 완화된다는 신호에도 불구하고 실업문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각종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 실업자 1,500만명, 실업률 9.5%로 최악의 상황을 보이고 있지만 2007년까지만 해도 실업문제에 관한한 모범국이었다. 많은 선진국이 신흥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한 뒤 만성적인 고실업에 시달렸지만, 해고와 고용의 제도적 장벽이 없는 미국은 재취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4%대의 낮은 실업률을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 기업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량 해고를 감행하면서 실업자가 급증하고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유연한 노동시장'도, 구인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실업 문제 해결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해고 조건이 엄격한 서유럽의 실업률은 안정세를 유지했다.
심지어 독일은 2007년 8.4%이던 실업률이 지금은 7.7%로 떨어졌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는 "미국의 노동시장은 지나치게 유연하다"며 "정상적인 시기에는 노동의 유연성이 경제에 도움이 되지만 침체시기에는 독이 된다"고 FT에 말했다.
취약한 사회안전망은 화를 더 키웠다. 마지막 직장에서 1년 이상 정규직으로 근무해야 하는 까다로운 실업수당 수령 조건 탓에 실업자의 절반 이상이 실업수당을 받지 못했다. 노동 유연화 정책으로 급속히 늘어난 비정규직을, 1935년 제정된 실업수당제도로 보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한다 해도 실제 받을 수 있는 실업수당은 직전 월급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직업을 잃으면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주택상환금을 갚지 못해 집마저 빼앗길 수 있다. 버지니아주 샬롯스빌 시장은 "실업상태가 지속되면 주택은 물론 차까지 압류되기 때문에 실직 가정 자녀들을 계속 학교에 다니게 하기 위한 차량 지원이 필요할 정도"라고 말했다.
실업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정규직도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말 현재 일주일에 30시간 정도 밖에 일할 수 없는 비정규직은 1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노동 시간이 길지만 지금은 주당 노동시간이 33시간으로 사상 최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사회에 갓 진출한 젊은 세대는 취업은 안된 상태에서 대학등록금을 갚지 못해 줄줄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있다. 현재 20~24세 미국 젊은이의 15%가 실업자다.
라이시 전 장관은 "많은 미국인이 실업을 여전히 개인 차원의 문제로 여기고 사회안전망 확충도 사회주의적이라며 거부하고 있다"며 "지금처럼 심각한 실업 상태가 내년 이후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 만큼 내년 선거에서는 사회안전망 확충이 주요 이슈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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