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우린 망원경도 없었죠… 이젠 우주 독립국으로"
40년 전인 1969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한국시간),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이 인류 사상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장면은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충격이다. 인류 탐험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인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은 전 인류의 5분의 1이 지켜본 화려한 이벤트이자 우주공학과 행성과학의 발전을 한 차원 끌어올린 분기점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비슷한 역사적 사건을 앞두고 있다. 국내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KSLV-Ⅰ)가 우리 땅에서 자력으로 발사되는 것. 8월 초로 예정된 나로호 발사가 성공하면 우리나라도 위성기술과 발사기술을 두루 갖춘 진정한 우주국이 된다.
달 착륙 40주년을 맞아 두 세대에 걸친 4명의 과학자가 16일 서울 여의도에서 모였다. 당시 TV 중계에서 해설을 맡아 '아폴로 박사'로 유명해진 원로 천문학자 조경철(80) 박사, 그때 초ㆍ중학생이었던 김용하(53) 충남대 자연대학장과 이상률(49)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위성연구본부장, 100일 된 아기였던 최영준(40)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까지, 자리를 함께 한 이들은 인류의 미래와 한국인의 모험심과 과학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한 자리에 모시게 돼 반갑습니다. 40년 전 달 착륙은 저마다 인상적인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조경철= 제가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해였습니다(조 박사는 미 항공우주국ㆍNASA 연구원으로 일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치과학자정책의 일환으로 1968년 귀국해 과학기술정보센터 사무총장, 연세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제가 NASA에 있었다고 KBS 중계 해설을 맡았죠. 그때 아, 대단했습니다. TV가 집마다 없던 시절이라 착륙 순간을 보라고 말이죠, 남산에 와이드스크린을 설치하고, 임시 공휴일로 선포했습니다.
그만큼 전례없는 인류의 쾌거였던 겁니다. 저도 해설하면서 무중력 상태에서 볼펜이 둥둥 뜨는 게 얼마나 신기해 보였는지! 착륙선이 역분사하면서 달표면에 다가가 6m, 5m, 4m, 마침내 표면에 닿아 달먼지가 올라오는데 제가 중계를 하며 너무 흥분해서 그만 "만세"를 부르다 뒤로 넘어가지 않았겠어요?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나중에 코디미언들이 따라할 정도였거든요. 그때부터 '아폴로 박사'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이 붙었죠.
▲김용하= 저는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물상 선생님이 8자 궤도를 가르쳐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냥 지구에서 달까지 일자로 가는 줄 알잖아요. 제가 천문학자가 된 데 은연중 영향을 끼쳤겠죠.
- 달 착륙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이상률= 아폴로 탐사는 공학체계를 바꿔놓았습니다. 수작업으로 했던 일들이 그것을 계기로 전자계산기와 컴퓨터로 바뀌었고, 1970년대초 반도체와 PC 개발이 이어졌습니다. 1960년대 아폴로 프로젝트가 이러한 공학적 발전을 앞당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용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아폴로 17호까지 6번, 6곳의 달표면 암석 328㎏을 채취한 것입니다. 방사성동위원소측정법으로 암석의 연대를 분석, 달의 나이가 30억살 이상, 최대 45억살이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또 달에는 유기물질이나 휘발성 물질이 전무한 멸균상태라는 사실도 확인됐죠.
▲조경철= 이전엔 달에 세균이 있을 거라고 여겨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이 지구 귀환 후 격리됐었는데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죠.
▲김용하= 우주인들이 지진계, 레이저 탐지기 등을 직접 갖다놓고 온 덕분에 달에 지진이 잦다는 사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1년에 수㎝씩 멀어진다는 점 등도 알 수 있게 됐죠.
▲최영준= 태양계에 대한 가설들이 처음으로 검증된 것이죠. 게다가 "인간이 하려고만 하면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무식한 임무였어요. 지금 지식으로는 그때 우주인들이 조금 더 오래 달에 머물렀거나 조금만 더 태양풍이 강했다면 대단히 위험할 정도로 방사선에 피폭됐을 겁니다.
NASA가 우주인이 3~4개월쯤 머물면서 더 먼 우주로 나아갈 전초기지로서 달기지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지진, 유성우, 방사능, 달먼지 등 위험요소를 해결하는 과제를 설정했는데, 아폴로 탐사로 달에 대한 지식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 그때와 지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조경철= 망원경 하나 없던 시절입니다. 국립천문대가 발족한 것이 1973년이고, 천문학과가 있는 대학은 서울대와 연세대뿐이었죠. 이제는 40여개의 천문대, 예닐곱 군데의 천문우주학과, 정규 연구원 670명이나 되는 항공우주연구원도 있으니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1992년에 우리별1호가 뜨면서 우리나라도 우주시대가 개막된 것 아니겠어요?
▲이상률= 로켓 개발의 역사는 보다 오〉틱윱求摸?위성 개발은 1990년대부터죠. 그것도 카이스트의 프로젝트로 시작한 것이었고, 정부 차원에서 우주개발의 의지를 공식화한 것은 1996년 우주개발중장기계획이 처음입니다. 결국 지난 15년간 아주 집중적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해 다목적실용위성 1,2호 발사와 2002년 액체로켓실험에 성공하는 등 짧은 기간에 성공적인 성과를 냈다고 자부합니다.
- 그런 점에서 8월 초로 예정된 나로호 발사의 의미가 남다를 텐데요.
▲이상률= 나로호 발사는 우주독립국으로 가는 첫발입니다. '우리가 만든 위성을 우리 땅에서 우리 발사체로'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슬로건이 선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인공위성-발사장-발사체라는 3박자를 갖춘 것이니까요. 물론 발사체 1단은 우리 독자기술이 아니라는 한계를 지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오죽하면 그랬을까요. 다음엔 어디로 갈 것인지에 더욱 지혜를 모아서 2018년 한국형 발사체(KSLV-Ⅱ) 개발에 성공한다면 앞으로 15년 뒤엔 우리가 만든 달 탐사선을 우리 땅에서 발사할 수도 있을 겁니다.
▲김용하= 이제 우리도 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독자 수단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발사에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후가 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지금도 1단은 러시아가 개발한 것이고 2018년까지 한국형 발사체를 독자 개발해야 하는데,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용인하면서 지속적으로 투자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입니다.
- 나로호 발사 후 우리나라도 달 탐사에 도전한다는 계획입니다. 달 탐사 후발 주자로서 우리에겐 어떤 전략이 필요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이상률= 항공우주연구원은 2025년 550㎏급 소형 쌍둥이 탐사선을 보내 하나는 달에 착륙시켜 샘플을 채취하고 하나는 샘플을 넘겨받아 귀환한다는 독특한 계획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본보 1월 21일자 30면). 탐사선 2기를 달 궤도에서 랑데부시켜 샘플을 갖고 귀환한다는 아이디어는 어쩌면 만화 같은 생각이지만 세계 최초의 도전적 시도입니다. 천문학적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많은 기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김용하= 달 탐사하면 돈이 생기냐는 말도 나올 것입니다. 분명 아직은 응용기술이 아닌 기초연구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달로 돌아가고, 일본 인도 중국 등이 경쟁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도 함께 협력해 어깨를 겨룬다면 과학적 발전을 자극하고 국가브랜드를 제고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소형탐사탑재체 개발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NASA도 7,000만달러를 들인 루나 프로스펙트 탐사선으로 달의 극지방에 물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이를 위해 국가과학비즈니스벨트에 설립될 기초과학연구원의 프로젝트로 포함되면 좋을 것입니다. 대학과 연구소 등에도 연구비를 지원해 기초연구를 유도해야 합니다. 실패를 용인하면서 풀뿌리 연구를 지속하다 보면 우리도 경쟁력 있는 독자기술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최영준= 앞으로는 언제까지 무엇을 쏘아올린다는 임무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대기과학, 지질학 등 다양한 분야로 구성된 행성과학자들이 통합해 기초연구 아이디어를 내고, 공학자들은 그 가능성을 검증하는 연구체계가 자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달에 간 사실을 오래오래 전하는 일은 데이터를 요리할 기초과학자의 몫입니다.
▲조경철= 한때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로켓 소유국이었습니다. 1447년 조선 세종 때 최무선의 아들 최해선이 개발한 대신기전은 길이가 5.6m에 화약 2,900g이 들어간 세계 최대의 로켓이었습니다. 나로호 발사 성공으로 또 다시 만세를 부르고, 앞으로 계속 성과가 이어지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진행·정리=김희원기자 hee@hk.co.kr
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 인류 달 착륙 가려진 진실들
미국의 아폴로계획은 1957년 구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 발사를 성공시킨 데 따른 충격에서 비롯됐다. 1967~72년 아폴로호라는 이름의 우주선이 6차례 달에 인간을 착륙시켰다. 비행중 사고로 되돌아온 아폴로 13호를 제외한 11~17호다.
매번 3명의 우주인이 탑승했지만 달에 발을 디딘 우주인은 12명. 3명 중 1명은 달 궤도를 돌 우주선을 지키기 때문이다. 아폴로 11호의 경우 착륙선 이글호가 아닌 우주선 컬럼비아호를 조종한 마이클 콜린스가 이에 해당한다. 영광의 역사 뒤에 가려진 그들은 달 뒤편의 절대암흑과 통신두절을 견뎌야 했다.
영광이 비껴간 이는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원래는 올드린이 먼저 달에 내릴 우주인으로 계획됐지만, 이글호의 내부구조상 암스트롱이 먼저 내려야만 했고 역사는 암스트롱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다만 유명한 달 발자국 사진은 올드린의 것이다.
달 방문이 반복되면서 우주인들은 새로운 달 보행법을 선보이고 골프를 치는 이벤트(1971년 앨런 셰퍼드)까지 벌이는 등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일반인의 관심은 급속히 식었고 막대한 비용이 부담이었던 아폴로계획은 1975년 마무리됐다.
지금 달에는 달 착륙선과 탐사차, 성조기 등 인류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기념물도 있다.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은 73개국 대통령과 수상의 평화 기원 메시지를 담은 컴퓨터 디스크를 달에 남겨두고 왔는데, 거기에 우리나라도 포함돼 있다. 달에는 미생물도 기후활동도 없어 지금도 당시 놓여진 그대로다.
'달 착륙은 완전 조작'이라는 음모론은 여전히 즐거운 이야깃거리로 통한다. 공기가 없는 달에서 성조기가 펄럭였던 점, 달에는 대기가 없어 지구보다 더 선명하게 사진으로 별이 찍혀야 하는데도 NASA가 제공한 사진에 별이 찍히지 않았다는 점, 그림자의 각도가 한 방향이 아니라 조작된 냄새를 풍긴다는 점 등이 음모론이 내세우는 달 착륙 조작설의 근거들이다.
달 착륙 직후 나왔던 조작설은 2001년 미국 폭스TV가 조작 의혹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등 때마다 재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음모론이 지적하는 것들에 대한 반박도 명백하다. 아폴로 11호의 우주인들은 달에서 머문 2시간 13분 중 10분을 성조기를 꽂는 데 할애했을 만큼 성조기 의식이 중요한 이벤트였는데, NASA는 성조기 윗부분에 가로 방향으로 봉을 대고 주름을 잡아 기가 펄럭여 보이게끔 연출했다.
그림자가 엇갈린 것은 울퉁불퉁한 달 표면 때문이었고, 별이 찍히지 않은 것은 달 표면이 잘 찍히도록 카메라를 조절한 탓이었다. '펄럭이는 성조기'와 관련된 사실은 냉전이 끝난 후 1992년 미국이 그때까지 비밀로 유지해왔던 우주개발 관련 정보를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김희원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