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이 3만명에 육박하는 KT 노동조합의 민주노총 탈퇴는 한국 노동운동의 핵심 동인(動因)이 이념과 명분에서 실리로 급속히 이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약자인 노동자의 연대를 기치로 내건 민주노총의 위상 약화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념에서 실리로 전환
KT 노조는 17일 민주노총 탈퇴를 공식 선언하며 '민주노총의 과도한 정치투쟁과 내부 정파 싸움'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금속노조에 밀려 민주노총 운영과정에서 KT 노조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해온 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요컨대 '민주노총이 지시만 내리고 우리를 위해 해주는 게 없는데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KT 노조의 허진 교육선전실장은 "민주노총 탈퇴를 계기로 앞으로는 조합원의 실익을 중시하는 조합활동과 중도개혁노선에 기반한 노동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달라진 노동환경도 또 하나의 요인으로 꼽힌다. 노동부 관계자는 "과거에는 민주노총이 전면에 나서 강하게 밀면 사용자들이 대부분 양보했는데, 이제는 대부분 강경하게 맞대응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KT 노조의 입장에서는 KTF와의 합병 이후 예고된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리를 챙기려면 현 정부와 껄끄러운 관계인 민주노총과 결별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기로에 선 민주노총
70만명 조합원을 자랑하는 민주노총은 KT 노조의 이탈에 따른 타격이 '70분의 3'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실제 타격은 그 열 배 이상이며, 향후 대형 사업장의 연쇄 탈퇴가 이어질 경우 조직 자체가 위태로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사태로 민주노총은 정보기술(IT) 분야에서 거점을 완전히 상실했다. 민주노총은 산하에 3만7,000여명이 가입한 IT산업연맹을 두고 있는데, KT 노조원 3만명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된다. 또 3만여명이 매달 납부해 온 조합비가 끊기면서 가뜩이나 궁핍한 민주노총의 재정 기반도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일이 '불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화물연대 파업과 쌍용차 사태 등 정치색 짙은 연대파업 노선을 여전히 고수할 태세인 만큼, 다른 대형 사업장 노조도 실리를 찾아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 노조 윤해모 지부장이 지난달 금속노조와의 갈등으로 사퇴한 것이나, 최근 현대차 노조 산하 정비위가 조합비 납부 유예와 함께 금속노조 탈퇴를 결의한 것 등은 민주노총에게 매우 불길한 징조이다. 노동계 관계자는 "현대차와 금속노조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기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경우 민주노총은 와해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KT 노조가 '무소속 노조'를 선언한 만큼, 향후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구도 역시 양대 노총체제에서 기업별 노조가 실리에 따라 투쟁하는 다극체제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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