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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가리 막걸리' 수사 장기화에 민심 흉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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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가리 막걸리' 수사 장기화에 민심 흉흉

입력
2009.07.1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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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살인 사건이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불신과 공포로 몰아 넣고 있었다. 섬진강 건너 별봉산(614m) 자락에 작은 냇가를 끼고 앉은 전남 순천시 황전면 Y마을.

농사철이면 주민들이 "성님(형님)" "어이, 동상(동생)" 하며 이웃집을 제 집 드나들 듯 하고 농사일 품앗이 후에는 스스럼없이 서로 술을 받아주는 정 두텁던 마을이다. 지난 4일 칠순 생일을 맞은 한 주민이 동네 사람들을 마을회관에 불러모으고 돼지를 잡아 한바탕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잔치 이틀 뒤 갑자기 마을 분위기가 스산해지기 시작했다. 최모(59ㆍ여)씨 등 주민 2명이 희망근로 현장에서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를 마시고 숨졌다. 누군가가 독이 든 막걸리를 최씨 집 마당에 갖다 놓아 이를 나눠 마신 최씨 등이 독살 당한 것이다. 127가구 270여 명이 사는 동네지만 목격자나 제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도 "마을 내부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할 뿐,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난생 처음 맞닥뜨린 독살 사건에다 "동네 사람 중에 범인이 있을 수 있다"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자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15일 오후 마을 입구에서 만난 70대 할머니는 "깝깝하고 불안해 죽겄다"고 말했다. "독살 사건이 터지고 나서 외지로 나간 자식들한테 전화가 왔는디, 뭐라고 헌지 알어? 음료수 한 잔이라도 누가 주면 절대로 먹지 말라고 글드랑께."

지팡이로 땅을 툭툭 치던 노인은 "그 놈(범인)을 빨리 잡아야 마을이 편안할 것인디"라며 친구의 동의를 구했다. 잠자코 있던 옆 노인도 "두 말 하믄 시끄럽제. 말대꾸 말고 가던 길이나 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이어 산쪽으로 난 폭 2m 남짓 되는 시멘트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지만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다 운 좋게 대문이 열린 집에 들어가 한마디 건넬라치면 대개는 뜨악한 표정으로 "맴이 거시기한게 아무것도 묻지 마쇼"라며 말문을 막았다.

창문으로 얼굴만 빼꼼히 내밀던 한 주민은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독극물 막걸리 사건 이후 동네 사람들이 부쩍 불안해 하고 의심도 많아졌다"며 "주민들이 탐문에 나선 형사들에게 이런 저런 말을 했다가 괜한 입방아에 오른 적도 있던 터라 그런 것이니 이해하라"고 말했다.

마을은 겉보기에는 평온을 유지하는 듯 했지만 곳곳에 강한 불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정자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던 박모(64ㆍ여)씨는 "동네 사람들이 부침개 등 이런 저런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먹기를 좋아했는데,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이후 뚝 끊겼다"며 "혹시 누가 또 독(毒)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 아니겠냐"며 혀를 찼다.

한 할머니가 주름진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거들었다. "인자는 옆집에서 전 부쳐 놨응께 건너오라고 하믄 무섭고 그런당게. 참말로 큰 일이여. 남들 보기도 부끄럽고…." 이 마을 사람들에게 '독극물 막걸리 사건'은 잊고 싶은 악몽인 듯 했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어떻게든 (범인을)잡아서 죽여브러야 써"라고 독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진척이 없다. 사건 발생 열흘이 됐지만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고 "범인은 마을 사람이고, 최씨가 범행 대상이었다"는 추리만 있을 뿐이다.

경찰은 "평소 마을 일을 잘 도와주는 최씨 남편에게 주민들이 술을 갖다 주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몰래 청산가리를 막거리에 타서 최씨 집에 갖다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만 경찰은 최씨 남편은 막걸리를 마시지 않는 점으로 미뤄 최씨가 범행 대상이었을 것으로 보고 최씨의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누구에게서도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최씨와 얽힌 재산갈등이나 치정관계 등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민 서너 명이 최씨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이 것만으로 살인 사건의 얼개를 엮기엔 불충분하다.

경찰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진 채 "범인은 마을 안에 있을 것"이라는 말만 퍼지면서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다. 주민 최모(61ㆍ여)씨는 "우리 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소름이 쫙 끼쳤다"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괜시리 주위를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찰 수사 태도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다. 강모(74ㆍ여)씨는 "형사들이 범인은 잡지도 못하면서 탐문한답시고 매일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는 통에 노인들이 더 불안해 하고 있다"며 "단서도 없이 마을 사람들 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라고 떠드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순천=글·사진 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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