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다. 토속적이면서 이국적이다. 철야의 유흥으로 흥청대지는 않지만 쾌적하지도 않고 오히려 불편한 길이다. 그 길을 끼고 하루에 감사하며 내일을 고대하는 범상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러나 외지 사람들은 '특별한 공간'이라며 하나 둘 몰린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경리단길. 녹사평역 2번 출구 건너편에서 남산3호 터널로 향하다 우회전해 하얏트호텔까지 이르는 길이다. 행정구역 상 회나무길이라 지칭하지만 육군중앙경리단이 위치하고 있어 경리단길로 널리 알려진 이 곳이 최근 20~30대 젊은층을 중심으로 꼭 가볼 만한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 서울 속 작은 지구촌
이태원2동은 작은 지구촌이다. 인도, 아르헨티나, 에티오피아 등 육대주 곳곳에서 이곳을 찾아 둥지를 튼 외국인은 384명(용산구청 등록 외국인 집계). 벽안의 얼굴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숯불생고기집의 둥그런 철제 식탁에 둘러 앉아 조용히 삼겹살을 뒤집는다.
그 옆 조그마한 재래시장은 호객의 목소리로 활기를 더하고, 수많은 수입차들이 무심한 엔진 소리를 내지르며 스친다. 피부 빛깔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서 일상의 행복과 미래의 꿈을 찾는 곳이다.
획일화되지 않은, 아니 획일화될 수 없는 삶들이 인종의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어서일까. 이질적인 간판들도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한다. 'LA Reality'라는, 부동산 중개업소라 보기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이국적 간판 옆으로 '남산김치찌개집' 상호가 뜬금없다 싶게 이어진다.
어디 그뿐이랴. 이탈리아, 미국, 일본, 태국, 터키, 멕시코 음식 전문점들이 '숯불바비큐치킨' '추억의 연탄구이' '여왕벌' 등의 토속적인 간판과 머리를 잇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세계 음식의 집합소라 해도 무방하다. 외국인들과 거주민들 뿐 아니라 외부인들의 발걸음까지 끌어당기는 이곳의 강렬한 매력 포인트다.
● 제2 삼청동, 가로수길로 성장 중
경리단길의 인기는 최근 부쩍 늘어난 외국 음식점들의 면면만으로도 가늠할 수 있다. 1년여간 경리단길에 새로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가게들은 스페인 레스토랑 '미 마드레'(2008년 5월)와 홈메이드 디저트점 '레이지 수'(2008년 6월), 정통 로마식 피자 전문점 '피자리움'(2008년 7월), 일본식 선술집 '요리사 손지영의 핫토리키친'(2008년 7월) 등 대략 9곳이다.
30㎡에 채 못 미치는 이른바 '한뼘 가게'들이지만 경쟁력은 만만치 않다. 2003년 멕시코 음식 타코 전문점 '타코 칠리칠리'의 개업을 시작으로 5곳 가량이 아옹다옹 고객 유치 경쟁을 펼쳤던 시절은 이젠 먼 과거다.
경리단길에 위치한 한신부동산의 문형원(39)씨는 "가게 임대 문의가 꾸준하다"며 "빈 점포가 생겼다 하면 외국식당이 바로 들어온다"고 말한다. 5년 동안 이곳에서 횟집을 운영했다 업종을 전환하고 있는 노인선(51)씨는 "1년 사이 손님이 50% 가량 늘었다. 최근 2~3년 사이 가게 임대료도 30% 가량 뛰어 올랐다"며 경리단길의 변화를 증언한다.
● 넉넉한 세계 맛의 유혹
경리단길의 먹거리들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다른 데서 보기 힘든 세계 각국의 개성만점 맛깔진 요리를 내놓는데다 가격까지 착하기 그지없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음에도, 남산3호 터널과 반포대교 사이를 잇는 8차선 도로 옆 자동차가 뿜는 소음과 매연이 귀와 코를 괴롭혀도 이곳을 찾는 이유다.
직장인 김형진(36)씨는 "경리단길 가게들은 독특하면서도 맛도 있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아 아내와 1주일에 한 번 꼴로 찾는다"고 말한다.
대부분 외국인이 주방을 지휘하거나, 요리 유학파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점도 이곳 음식점들의 특징이자 자랑이다.
네모난 조각피자로 손님을 모으는 '피자리움'과 스페인 음식점 '미 마드레', 일본식 선술집 '요리사 손지영의 핫토리키친'은 각각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일본에서 요리를 공부한 주인이 주방을 지킨다.
개업 한 달을 넘어선 '만나 데리야키'는 미국 시애틀에 동일한 가게를 운영했던 사람이 차렸다. 터키 음식점 '이스탄불'은 터키 요리사가 제공한 재료를 바탕으로 케밥 등을 내놓고 있으며 태국 음식점 '부다스벨리'는 태국 요리사가 솜씨를 발휘한다.
주인장들의 별스러운 사연도 맛의 깊이를 더한다. '레이지 수'는 일본에서 제과 공부를 하고, 화장품 회사를 15년간 다닌 이수연(47)씨가, '피자 굽는 부엌'은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7년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배운 30대의 김정임씨가 운영하고 있다.
● 익숙한 듯 이국적인
사람들은 생활의 녹이 끼고 때가 묻은 이 곳에서 묘한 낭만과 운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직장인 최지연(32)씨는 "트렌디한 맛집이 많은데도 동네 분위기가 조용해 포근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직장인 김연경(32)씨도 "삼청동이나 가로수길은 멋스럽게 꾸민 흔적이 역력하지만 경리단길은 자연스러워?좋다"고 거든다.
이국적인 매력이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스탄불'과 이탈리안 레스토랑 '녹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김영수씨는 "자녀들에게 다국적 문화를 경험시켜주기 위해 이 곳을 찾는 분들도 적지 않다"며 "주말에는 지방에서도 올라온다"고 말한다.
남산공원을 지척에 두고 있고, 한달음에 강남과 종로에 다다를 수 있는 지리적 여건도 경리단길 가게들에 사람들이 붐비는 요인. '피자리움'의 박찬호(37)씨는 "가족 단위 손님들이 피자를 테이크아웃해 남산공원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다"며 "주말에는 새벽에 나와 식사를 건너뛰며 하루종일 일해야 할 지경"이라고 전한다.
1.피자리움
정통 로마식 네모난 조각피자를 판다. 마르게리타 피자와 감자 베이컨 피자, 매운 살라미 피자 등이 한 조각에 5,000원 내외다. 탄산음료, 맥주 등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오전 11시30분~오후 10시30분. (02)312-7580
2. 썬더버거
2005년 신사동 가로수길의 썬더버거보다 먼저 문을 열었다. 패스트푸드가 아닌 슬로푸드를 지향하는 수제 버거를 팔고 있다. '오지지널 버거 세트' 9,500원 등 버거치곤 다소 비싸다. 오전 11시~오후 10시. (02)796-7005
3. 타코 칠리칠리
매콤한 맛이 매력적인 멕시코 음식 타코를 전문으로 판매한다. 타코의 한 종류인 타코알 빠스톨은 3,000원. 멕시코식 빈대떡인 토르티야에 고기, 해산물 등을 넣은 엔칠라다는 8,500원이다. 오전 11시~오후 10시. (02)797-7219
4. 만나 데리야키
생선에 간장 등을 발라 굽는 일본 요리 데리야키를 미국식으로 특화해 팔고 있다. 매운 맛이 일품인 스파이시 치킨 데리야키 7,000원 등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오전 11시~오후 10시. (02)749-9297
5. 미 마드레(2층)
국내에선 드물게 스페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타파스, 빠에야, 하몽 등 다양한 스페인 요리가 나온다. 오징어먹물빠에야 1만 5,500원 등 가격 부담이 크지 않다. 오전 11시30분~오후 10시30분. (02)790-7875
6. 스탠딩 커피(1층)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다. 인도에 의자를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 3,800원. '디럭스 컵'에 담긴 양이 둘이 먹어도 충분하다. 오전 7시~오전 12시. 016-211-5049
7. 카페 T8
경리단길에서 오래된 카페로 통한다. 커피와 샌드위치가 주메뉴이지만 저녁에는 와인도 식탁에 오른다. 명물 '두부샌드위치'가 6,500원으로 인기가 많다. 오전 11시~오후 10시 (02)794-7850
8. 타코 아미고
이태원 본점에 이어 최근 새로 문을 열었다. 멕시코 음식 타코의 정통 맛을 지향한다. 제육볶음과 조리법이 비슷한 파히따는 5,200원, 멕시코 피자 케사디아는 5,500원이다. 오전 10시~오후 10시. (02)797-7544
9. 와플 팩토리
다양한 와플을 즐길 수 있다. 커피와 팬케이크, 샌드위치도 판다. 두 겹의 와플 사이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담긴 와플바닐라프레스(9,000원)를 많이 찾는다. 아메리카노는 4,000원. 오전 11시~오후 10시. (020790-0447
10. 이스탄불
케밥 등 터키 요리를 판다. 인도 콩으로 만든 팔라페도 대표 음식. 프렌치 프라이드와 탄산음료 등이 포함된 세트 메뉴가 6,500원이다. 피쉬앤칩스는 8,000원. 오전 11시~오후 10시. (02)796-0271
11. 부다스벨리
정통 태국 음식을 접할 수 있다. 문을 열면 강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른다. ?c양꿍 9,000원 등 비싸지도 싸지도 않다. 태국인이 주방을 지키고 있다. 오전 11시30분~오후 10시30분. (02)793-2173
12. 레이지 수
직접 만든 브라우니와 파이를 팔고 있다. 핸드드립 커피가 맛을 더한다. 초코브라우니 한 판이 3만 5,000원, 한 조각은 4,000원에 판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3,000원. 오전 11시~오후 10시30분. (02)790-1912
13. 녹사
이탈리안 레스토랑. 이탈리아 시골 집에서 맛볼 수 있는 요리를 지향한다. 스프와 샐러드가 포함된 브런치는 9,500원. 파스타는 1만~1만 2,000원이다. 전시 공간 역할도 하고 있다. 낮 12시~새벽 2시. (02)790-0776
15. 요리사 손지영의 핫토리키친
일본식 선술집. 도미뱃살 데리야키(2만원)과 샐러드 우동(1만 8,000원)을 기본 메뉴로 돈가쓰나베, 연어크림소태, 새우튀김 등 매일 다른 음식을 내놓는다. 오후 7시~새벽 2시. (02)792-1975
16. 피자 굽는 부엌
정통 이탈리안 피자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페페로니 피자 9,500원, 1인 고객을 위해 5,000원짜리 미니피자도 판다. 5,500원에 하우스 와인 한 잔도 즐길 수 있다. 정오부터 자정까지. (02)797-5969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 작지만 개성만점 카페·식당들 발걸음 세우다
경리단길의 가게들은 작다. 4~10평 정도의 초미니 레스토랑이 대부분이다. 옆 자리 손님과 무릎이 닿기도 하고, 주인장이 요리하는 모습이 코 앞에서 보인다. 이 작은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을까. 주인의 이력만큼 작지만 독특한 개성이 넘치는 식당과 카페 네 곳을 들렀다.
● 피자리움
로마식 조각피자 전문점 '피자리움'은 아담하다기보다 좀 비좁다. 20㎡ 가량의 공간에 2인용 탁자가 5개. 가게 바깥 인도에 비치파라솔과 함께 설치한 의자 8개까지 포함, 기껏해야 18명이 동시에 피자를 즐길 수 있다. 한데 주방에서는 4명의 장정이 어깨를 부딪히며 피자를 굽는다. 큰 돈을 벌기는커녕 손해나 나지 않으면 천만다행이겠다 싶다.
그러나 주인 박찬호(37)씨는 연신 미소를 짓는다. 매운 살라미 피자 등 5,000원 내외의 네모난 피자조각이 평일엔 300조각, 주말엔 500조각 가량 팔리기 때문이다. 주말엔 손이 모자라 주방에 1명이 더 투입된다. 정통 이탈리아의 신선한 맛이 인기 비결이다.
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전공한 박씨는 6년간 대형백화점의 바이어로 살았다. 남들은 번듯한 직장이라 부러워했지만 그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 결국 대학시절 어학연수를 하며 품은 꿈을 펼쳤다.
2005년 로마행 비행기를 탔고, 피자학교 '아 따볼라 꼰로 셰프'(A Tavola Con Lo Chef)에서 공부한 뒤 로마의 '피자리움'에서 일을 배웠다. 2006년 귀국해 이화여대 앞에 '치로'라는 이름으로 첫 개업을 했고, 지난해 가게 이름을 바꿔 경리단길로 옮겼다.
"국내에 많이 보급된 화덕 피자는 나폴리식입니다. 오븐에 굽는 로마식 네모 피자 가게는 아마 저희가 유일할 것입니다. 경리단길 가게는 색다르고 이국적인 맛을 지니고 있으면 다들 장사가 잘 됩니다."
● 미 마드레(Mi Madre)
허름한 건물의 숯불구이집 옆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더니 뜻밖에도 따스한 분위기의 아늑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2, 3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테이블 6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주방에 걸린 노랑, 빨강색의 선명한 컵들, 벽면에 그려진 플라멩코를 추는 남녀의 모습이 이곳이 스페인 식당임을 알려준다. 주방은 마치 집의 부엌처럼 완전히 오픈돼 있다.
'미 마드레'의 사장 정승원씨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 주인장이 공짜로 술도 더 주는 '타파스 바'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타파스'는 다양한 메뉴를 소량으로 먹는 스페인의 간식이다.
정씨는 패션 MD 출신. "10년 넘게 정신없이 일하다가 문득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돌아와 지난해 5월 이 식당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스페인 음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역적 분위기와 작은 규모로 큰 부담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경리단길을 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을지는 풍경을 기막히게 담아내는 커다란 창문 두 개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정씨가 말하는 스페인 음식의 매력은 소박함이다. 순수하게 식재료의 식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포인트이고, 양념이나 장식도 별로 없다.
직접 육수를 우려내 만든 오징어먹물 빠에야와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인 토르티야 에스파놀랴에 와인 칵테일인 상그리아까지 곁들이면 안달루시아 지방의 풍경이 펼쳐지는 듯 하다. 가격도 저렴해 평일 점심엔 9,500원에 정통 빠에야를 맛볼 수 있다. 테이블 수가 작은 만큼 예약은 필수. 식당 이름은 '우리 엄마'라는 뜻이다.
● 스탠딩 커피
이름처럼 이곳에서는 편안하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기 힘들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부분이 가장 큰 매력이다. 달랑 4개 있는 높다란 테이블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보도블럭 위에 툭툭 올려져 있고, 메뉴판은 도로표지판 기둥에 매달린 채다. 테이크아웃이 기본이지만, 먼 데서 찾아온 손님들은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4월 오픈한 이곳의 분위기는 감각적이고 젊다. 정직하고 커다란 글씨체로 쓴 검정색 로고, 경쾌하게 울리는 일렉트로닉 음악, 흰 셔츠에 멜빵, 크롭트 팬츠에 스니커즈까지 맞춘 20대의 남자 바리스타들.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연상된다는 이들도 있다.
스탠딩 커피의 인테리어부터 의상, 조명, 음악 등 모든 것은 사장 김상혁(29)씨가 직접 연출한 것이다. 그는 극단 미추와 디딤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 겸 무용수. "공연을 올리는 것은 합동 작업이잖아요. 여기서 나만의 무대를 올린다 생각하고 커피와 바리스타가 가장 돋보이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컨셉트는 뜻밖에도 정육점이었다고 한다. 고기를 보기 좋게 걸어놓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친근하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그런 느낌이 좋아서다. 다음달에는 이곳에서 사물놀이와 무용을 결합한 공연도 열 예정이다.
이곳 커피는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양이 많다. 아이스커피의 경우 보통 테이크아웃 커피점의 초대형 사이즈인 24온스 딱 한 종류다. 가격은 양에 비해 착한 편. 너무 많지 않냐는 질문에 김씨는 "둘이서 나눠 먹으면 되죠. 맛있는 커피를 저렴한 값에 푸짐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라고 답했다.
● 요리사 손지영의 핫토리키친
일본식 선술집인 이곳은 과일과 야채 등을 파는 트럭들의 스피커 소리가 웅웅거리는, 생활공간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동산중개업소와 반찬가게들 사이에 있는 모습도 조금은 뜨악하다. 하지만 주변과의 부조화 속에서 자기 빛을 발하는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주방을 향해 놓인 등받이 의자가 6개. 등받이 없는 간이의자까지 포함해야 최대 12명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겨우 앉을 수 있다. 16㎡ 가량의 좁은 공간이지만 주인 손지영(35)씨가 펼쳐내는 일본요리의 세계는 넓기만 하다.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샐러드와 우동을 결합한 샐러드 우동은 정갈하고, 도미뱃살 데리야끼는 부드러우면서도 풍성한 맛이다.
마땅한 직업 없이 삶을 즐기던 손씨는 28세 다소 늦은 나이에 일본 요리유학을 떠났다. 손씨의 솜씨를 눈여겨본 고모가 반강제로 보낸 유학이었다. 핫토리영양전문학교에서 2년 과정을 공부한 손씨는 "평생 그리 공부를 잘해본 적 없다"고 자평할 정도로 요리에 빠졌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한 제약회사의 프랜차이즈 사업 신메뉴 팀장으로 1년을 일하다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고, 2008년 7월 개업했다.
손씨는 자기 이름을 내건 가게를 유쾌하고 맛있는 술집으로 만들고 싶다. 손씨는 "손님들이 아는 사람 집에서 잘 대접받는 느낌을 받도록 하고 싶다"고 말한다. "손님이 원하면 즉석 메뉴도 가능합니다. 저는 입맛 까다로운 손님이 반가워요. 저의 승부욕을 자극하니까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김지원기자 eddie@hk.co.kr
■ 사람들 몰리는 길의 유혹, 거니는것 만으로 행복한…
길에도 유행이 있다. 서울의 트렌드세터들은 번화한 대로변을 피해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다닌다. 작지만 독특한 개성이 있는 길과 그 속의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최근 가장 주목받은 길은 신사동의 가로수길이다. 아기자기한 패션숍과 개성있는 카페, 갤러리,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 있는 가로수길은 압구정과 인접해 있지만, 강남보다는 강북 정서가 강한 곳이다. 주차도 거의 불가능하고, 화려한 간판이나 건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주말만 되면 이 좁은 길을 따라 걷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서초동 서래마을의 서래로와 몽마르뜨길은 프랑스라는 뚜렷한 컨셉트를 갖고 있다. 3, 4년 전부터 브런치 문화와 더불어 인기를 모은 곳이다. 상업지역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많이 사는 주택가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이 길들은 바게트빵을 파는 베이커리와 노천카페 등 낭만적인 유럽의 시골 마을 풍경을 닮았다.
5, 6년 전부터 한국적 전통미로 인기를 모은 삼청동길은 한옥을 개조한 와인바와 커피숍, 와플가게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이제는 강북 음식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이색 박물관과 빈티지숍들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유명세를 타면서 예전의 고즈넉한 맛이 사라져 요즘은 인근 효자로와 부암동길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삼청동길로 접어드는 길목에 버티고 있던 기무사터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설 예정이라 이곳에 밀집한 화랑가와 함께 또 다른 풍경을 그려낼 것으로 기대된다.
덕수궁 돌담길로 불리는 정동길은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길 중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행복을 그린 화가_르누아르'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다양한 전통 공연이 열리는 정동극장 등으로 연결되면서 문화적 풍미도 가득하다.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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