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노동자의 편에 서야 할 노조지도부가 채용비리 기금 횡령 등으로 재산을 축적하여 귀족화한다는 소식은 절망과 좌절을 안기고 있다." 2005년 5월 노동운동가 전순옥 씨의 이른바 '귀족 노조' 발언이다. "그들은 귀족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정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전씨는 사회적 기업 '참 신나는 옷'의 사장님이다. "경찰의 폭력에 분노하던 노동계가 무엇을 쟁취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씨는 분신 노동자 고 전태일 씨의 여동생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의 일기를 읽기 쉽게 편집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은 중학생 필독도서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와 나란히 올라 있다. 1970년 11월 13일 그는 세 마디를 남겼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2주 후에 결성된 청계피복노조는 대학가에서 움트던 노학(勞學)연대에 불을 붙였다. 69년 130건, 70년 165건이었던 노동자의 생존시위가 71년엔 1,656건으로 폭발했다. 그렇게 이어진 노동운동이 79년 8월 YH사건을 만들었고, 2개월 뒤 10ㆍ26사건의 단초가 됐다. 어린> 아름다운>
▦전씨의 아이콘은 투쟁이 아니다. 사랑이며 인간해방이다. 자신의 고통은 제쳐두고 동료와 소녀 공원들에 대한 배려가 앞섰다. "15세 어린 보조 공원들이 주 98시간 일하며 커피 두 잔 값도 안 되는 급료를 받고 있다. 햇볕을 쬐지 못해 눈병과 신경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이다. 그의 행동은 기업주나 정부에 대한 투쟁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사랑과 인간해방의 연대를 구성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 시절 그러한 방식은 바보같은 짓이었다. 그 연대를 스스로 '바보회'라고 불렀다.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재)전태일재단(02-3672-4138)으로 전환해 내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개소식을 갖는다. 전씨의 어머니 이소선 씨가 팔순을 맞아 그 동안의 일들을 승화시키는 자리다. 새로운 기치는 '운동권의 전태일을 넘어 국민 속의 전태일로'. 노동자 권익쟁취나 투쟁을 극복하고, 인간과 사랑,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품 속의 아들을 내놓았다. 당시 대학생으로 노학연대에 앞장섰던 장기표 씨가 이사장, 당시 중3이었던 전순옥 씨가 이사를 맡았다. 혼돈을 거듭하는 요즘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계기가 되면 좋겠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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