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려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처음 들어가면 "아름답게 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맨 먼저 시선에 들어온다. "아름답게"라는 말이 이렇게 강박처럼 성큼 다가들 때 저항감 없이 수납하게 되는 경우는 드문데 그게 르누아르일 경우에는 다른 얘기다.
'그네'라든가 '시골무도회'를 보고 있으면 르누아르가 지시한 아름다움이란 건 곧 평화로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랄 데 없이 화창한 봄날에 산책 나오다 우연히 만난 듯한 네 사람 곁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일 뿐인데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게 만든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반짝이는 햇빛이 골고루 스며들어 있는 평화로움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순간이다.
'시골무도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쩐 일인지 남자의 모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긴 하지만 약간 익살스러워 보이는 밝은 여자와 춤에 빠진 남자는 행복에 도취되어 몸을 밀착시키고 있다. 그 밀착감이 인생의 근심 없는 밝은 한 순간을 탄생시킨다.
보는 이들에게 르누아르의 환하고 풍요롭고 눈이 감길 것 같이 반사되는 빛들은 거의 꿈길에 다가선 듯한 나른함을 안겨준다. 우린 이런 아름다움, 평화로움, 밝은 빛, 부드러운 촉감, 행복의 기척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버렸나? 를 생각하게 한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오히려 가슴이 벅차오를 지경이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이나 해변가의 소녀들을 눈여겨 보고 또 보고 하는 감정도 비슷하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아름다움만을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둥글거나 풍만하거나 온화하거나 태연한 것들이 서로 상호조응하며 축복처럼 밝은 빛 아래 놓여있다. 개를 데리고 있거나 장미를 들고 있거나 귀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들 모두가 그 밝은 빛 속에 놓여있다. 우울과 비관, 절망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겐 로망의 풍경들이다.
르누아르는 스스로 여성이 없었으면 화가가 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고 했을 만큼 여성은 그에게 아름다운 세계 자체이다. '누드를 위한 습작'이 완성된 어떤 누드보다도 강렬하고 아름답다. 전시된 작품들 중 내가 오래 머문 작품 속의 여인들은 대부분 책을 읽고 있었다.
작품의 제목들도 '독서'이거나 '책을 읽는 젊은 여인'이거나 그냥 '책 읽는 여인'이다. 르누아르의 시대엔 책을 읽는 일이 지금 텔레비전 보는 일과도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여인들의 포즈는 정감 있고 관능적이다. 어깨를 드러내놓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옆으로 앉아서 책을 읽고 있거나 창가의 밝은 빛 속에서 풍만한 가슴을 엿보이게 하고 책을 읽고 있다. 어쨌든 이 모든 여인들은 그 순간에 빠져있고 평화로워 보인다.
아름다움에 집중해온 르누아르가 말년에 그린 '흰 모자를 쓴 자화상' 속의 본인의 모습은 뜻밖에도 단조로웠다. 자화상이라고 해놓지 않았으면 그냥 어떤 시골마을의 촌부와 다를 바 없이 늙고 깡마른 한 인간의 옆모습이 표정없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미술관을 빠져 나오는 순간 마주치게 된 광장과 거리를 따라 늘어선 경찰버스들이 혹시 르누아르에게조차 작품 속의 풍요와 평화와 밝음은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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