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6년 2월 16일 전북 김제시 흥사동(당시는 김제군 백산면 흥사리) 제내(堤內)마을 313번지에서 2남 4녀 6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내 밑으로는 여동생 하나가 있다. 제내라는 이름은 마을 바로 옆에 저수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곳은 익산시(그 때 이름은 이리)로부터는 남쪽으로 16km, 김제시로부터는 북쪽으로 4km의 지점에 있는 도로변에 십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사찰 흥복사(興福寺)가 있고, 해발 100m 남짓하지만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두악산과 승방산이 있다. 승방산 밑에는 외딴 집 한 채가 있는 '물탕 골' 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는 한 여름에도 발을 담그기 어려울 만큼 차가운 물이 넘쳐흐르는 큰 샘이 있었다.
제내 마을은 야산과 전답이 반반 섞여 있는 농촌인데 90년대에 김제시로 편입되고나서 마을 바로 옆에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그 모습이 마치 공장지대처럼 바뀌어 버렸다.
내가 태어난 집은 대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3개의 초가지붕 한옥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늘 아버지와 한 방에서 기거하면서 공부했다. 집 바로 옆에는 야채를 가꾸는 100평 정도의 밭이 있었고 집 주변에는 두 그루의 감나무와 앵두나무가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3,000평이 채 안 되는 논과 밭을 소작으로 경작하고 있었는데 수리시설이 없어 하늘만 바라보아야 했다. 비가 제때 내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민심부터 흉흉해졌다.
늦게라도 비가 오면 흐르는 물을 서로 제 논에 먼저 대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래서 '마른 논 물 대기'라는 속담의 의미를 나는 체감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으레 이런 현장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때 또 하나의 문제는 비료였다. 정부에서 비료 배급이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시장에서 사려면 비료 한 포대 또는 두 포대에 쌀 한가마를 주어야 할 만큼 귀했다. 그래서 생산성은 형편없이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각종 공과금은 농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일제때에는 공출이라 하여 할당량을 무상으로 강탈해 갔으며 해방 후에도 6ㆍ25 전쟁기를 전후해서 유사한 공과금이 많았다. 우리 집은 당시 동네에서는 비교적 나은 편이어서 추수 후 몇 달은 쌀밥을, 그 뒤로는 보리밥 죽 고구마 등으로 끼니를 이어 밥걱정은 하지 않았다.
족보를 보면 나는 시조 박혁거세의 66세손이다. 나의 조상은 1,000여 년을 경주에서 살다가 밀양으로 옮겨 그곳에서 300여 년을 살았다. 그 뒤 나의 22대조는 경기도 장단으로 이사 하였고 21대조는 다시 함경남도 영흥으로 옮겨 살았다.
성균관 대제학을 지낸 20대조 정제(貞齊) 박의중(宜中ㆍ1337~1403)은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우리 마을 옆 박성뫼(박씨가 정착한 곳)마을에 낙향하여 600년을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그 후손들은 현재 경북 문경과 의성, 충남과 함경도 등지에 널리 퍼져있다.
나의 조부 박연혁(1878~1908)은 배를 타고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했는데 서른에 타계하시고 20대에 혼자되신 할머니 안정인(1876~1955)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기르며 사시다가 내가 서울대에 합격한 직후 돌아 가셨다. 할머니는 용모 단정하고 이지적인 성품이었으며 솜씨가 좋아 주변에서 상을 당하면 상복 만드는데 뽑혀 다니셨다.
아버지 박현식(1894~1961)은 현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한학 선비였는데 곁에 있으면 찬바람이 불만큼 성품이 냉정하고 이지적 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서 따뜻함 보다는 엄하고 무섭다는 느낌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다정하지 못했으며 식사도 할머니와 나와 같이 드시고 내외분이 겸상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의 언행이 아버지의 뜻에 맞지 않으면 면박을 주는 일도 많아서 우리 형제들은 늘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때 한의사로서 개업하기도 했으나 곧 그만 두고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일을 제대로 못했으니 '반거충이'였다. 그러나 개혁적이고 민족의식과 지사적 기질이 있는 분이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교육입국을 주장하고 그 고장에 백석초등학교 설립을 발의 주도하였고 설립 후에는 오래도록 후원회장의 일을 맡았다.
또 영어와 일본어에는 모두 초서가 있는데 한글에는 초서가 없음을 개탄하고 평생을 한글 초서발명에 전념하여 그 연구결과를 <한글 씨> 라는 책자로 정리하기도 했다. 한글>
돌아가신 뒤 나는 60년대 초에 당시 문교부 박희범 차관을 찾아 이 연구결과의 실용화 가능성을 검토해 주도록 의뢰한바 있다. 그러나 초서가 정자보다 오히려 더 어렵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한글 씨> 는 지금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존 되어 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합격한 것을 보고 그 해 타계 하셨다.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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