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얼음과도 같았다. 조신한 말투는 다소 냉랭하게 느껴졌지만 뜨거운 심장의 열기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사진기자 앞에서 "어떡하지"를 연발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7편의 장편영화를 찍은 주연급 배우라기보다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여전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듯한 평범한 스물여섯 처자에 가까웠다.
정유미. 대중들의 귀에는 아직 설은 이름이지만 한국의 유명 감독들이 사랑하는 배우다. 국내 배우로는 드물게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으로 충무로에 존재를 알렸다.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2005)로 공식 데뷔식을 치른 그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 정윤철 감독의 '좋지 아니한가'(2007),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첩첩산중'(2009) 등 상업성보다 작가정신이 도드라진 영화에 거푸 출연하며 이름을 조금씩 알렸다.
혹자는 그에게 "저예산ㆍ독립영화의 디바"라는 찬사를 바친다. 누군가는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고고한 영화에만 얼굴을 비치며 이미지 관리만 한다"고 혹평한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편견도 경계했고, 자신에게 어떤 환상이 심어지는 것도 거부했다. 단지 "일단 내가 하고 싶으면 그냥 그것만 생각하고 열심히 할 뿐"이라고 말했다.
본인이야 어떻게 받아들이든 정유미는 상업영화와 거리가 먼 배우라는 선입관이 존재해 왔다. 그래서 인간과 식인 멧돼지의 사투를 다룬 괴수 영화 '차우'(감독 신정원ㆍ15일 개봉) 출연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따라 매일 똑같은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저의 팬이라면 믿고 따라왔을 때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감도 내비쳤다. 치아교정을 한 이빨로 애벌레도 거침없이 뚝 끊어먹는 '차우' 속 동물생태연구원 수련의 모습은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의 한 단면이다.
여러 영화를 거치며 매번 흥행에는 죽을 쑤었고 대중성도 제자리 수준이지만 그는 "그저 운명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많은 분들이 봐주시면 좋겠지만 제 의지대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하다보면 잘되는 영화도 있을 것이고요. 그저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고 싶어요. 시간은 일단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까요. 아쉬움과 후회는 또 다르더라고요."
정유미의 체념한 듯한, 그러면서도 눈 앞의 결과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자세는 대학시절부터 굳어진 것인지 모른다. 연예인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품었던 부산 출신의 그는 서울예대 영화과에 입학하며 영화에 눈을 떴다. 단편영화의 재미에 빠지면서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지웠고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을 발판 삼아 장편영화 출연 기회를 잡았다.
"단편영화 출연은 남에게 알려지진 않지만 저에게는 맞더군요. 단편 작업을 수없이 하면서 비로소 배우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됐어요. 허영심 버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니 지금의 시간이 운명처럼 찾아온 거라고 봐요."
라제기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