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위기가 자주 논란되고 있다. 언론 환경이 변하면서 '신문의 죽음'을 지레 예견하는 시각과, 과도기 혼란이 지나면 위상과 영향력을 되찾을 것이란 전망이 엇갈린다.
이런 가운데 미국 언론인 스트라이커 맥과이어는 얼마 전 '뉴스보도의 죽음(The death of reporting)'이라는 글을 썼다. 뉴스위크 런던지국장을 오래 지낸 그는 신문의 위기를 논하는 이들이 뉴스페이퍼(newspaper)의 '페이퍼'에만 초점을 맞추고 '뉴스'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신문의 위기에도 여전히 온라인과 방송에는 뉴스가 넘치는 것으로 여긴다는 얘기다.
갈수록 '진실보도' 와 멀어져
그는 온라인 매거진 살롱(salon.com) 창설자 등을 인용, 온라인 뉴스의 80% 이상이 신문 통신 등 인쇄매체가 생산한 것을 재활용, 재포장한 것임을 일깨웠다. 이런 현실에서 신문 통신의 재정난과 인력 감축에 따라 진실된 뉴스(real news) 보도는 갈수록 줄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의 위기에 가려진 뉴스보도의 위기다.
우리 언론 현실도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뉴스보도의 위기는 훨씬 심각하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가릴 것 없이 진실된 보도와 올바로 논평을 게을리하거나, 애초 그런 본분과 거리 먼 자세로 기자와 언론인 행세를 하는 풍조가 널리 퍼진 탓이다.
가까운 예로, 어제 <지평선> 칼럼에 언급한 위구르 사태 보도를 다시 살펴보자. 외신에 의존해 우루무치의 유혈사태를 전한 초기 보도가 모호하게 '유혈시위'로 규정한 것은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지난해 티베트 사태 때도 티베트인들의 폭동으로 주로 한족이 희생된 사실을 기억한다면, 위구르족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진 경위를 신중하게 추적해야 옳다. 그런데도 그리 애쓴 자취는 없이 성급한 진단과 논평을 내놓았다. 지평선>
어느 진보신문은 사설에서 "시위대가 불과 몇 천명 수준인 사실에 비춰 156명이나 숨진 것은 중국 정부의 진압이 얼마나 무차별적이고 가혹했는지 짐작이 간다"며 '야만적 진압'을 비난했다. 또 중국측 설명을 믿을 수 없다며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국제사회도 제2 텐안먼 사태가 없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 제법 그럴듯하다.
그러나 위구르족 시위가 폭동으로 번져 한족을 무차별 공격하고 버스 190대와 점포 수백 곳을 불태워 희생자가 많았다는 공식발표와 동떨어진다. 중국 정부는 사태 직후 외신 기자들에게 현장과 희생자 시체를 공개했고, 외신은 총격 흔적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신원 확인된 시체를 가족에게 인도했다는 보도에 비춰, 한족 137명과 위구르족 46명이 숨졌다는 집계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이렇듯 진실 보도와 거리 먼 우리 언론의 행태를 어찌 볼 것인가. 소수민족 문제가 사태의 근본임을 짚었으니, 잘못된 보도와 논평은 불가피한 것으로 용인해야 할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 것이 현실적 장애보다는 그릇된 사고와 자세에서 비롯됐다고 보기에 냉정하게 비판하고 통렬하게 반성해야 마땅하다.
보수언론이 낡은 이념의 틀에 얽매인다면, 진보언론은 민중 인권 자유 등에 맹목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외국 사태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반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진보적 가치는 고상하지만 구체적 현실에 무작정 적용하고 관철할 수는 없다. 이런 사리를 외면하는 습관이 체질화한 탓에 나라 안팎에서 쉽게 선과 악을 나누는 강파른 태도가 갈수록 두드러진다고 본다.
'신문의 위기' 재촉하는 잘못
악의적 일반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사례는 셀 수 없을 만치 흔하다. 이를테면 시위 대응과 관련해 정부를 독재라고 욕하다 못해 법원까지 함부로 비난하는 행태가 일상화했다. 오로지 정치싸움이 있을 뿐 진정한 언론 활동은 없는 현실이다.
보수언론을 제쳐두고 진보 쪽을 비판하는 이유는 사회의 진화 가능성을 한층 암담하게 하기 때문이다. 뉴스보도의 위기는 신문의 위기를 재촉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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