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히말라야 8,000m급 14좌(8,000m 이상 봉우리 14개) 완등 여성 산악인을 꿈꾸던 고미영(42)씨가 11일(이하 한국시간) 낭가파르바트(8,125m)에서 하산 도중 조난됐다.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관 측은 12일 "고씨가 이끄는 등반팀과 위성전화로 통화한 결과 등반팀이 고씨의 사망을 확인했다고 전했다"고 밝혔다. 대사관 관계자는 "현지 구조팀이 헬기를 동원해 13일 시신을 운구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며 "등반팀이 대사관측에 장례절차 및 시신 운구 등 문제를 상의했고 고씨 가족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는 대로 이 문제를 협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고씨의 원정대 소속사인 코오롱스포츠의 김영수 구조대책본부장은 "상황이 매우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 고씨의 사망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며 일말의 생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코오롱스포츠에 따르면 고씨는 10일 오후 낭가파르바트 정상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을 시작, 캠프4에서 휴식을 취하고 캠프3을 지나 캠프2로 향하던 중 100m를 남기고 실족해 해발 6,200m 지점에서 협곡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코오롱스포츠는 "조난 지점은 눈사태와 낙석이 많아 로프를 사용하기 힘든 일명 '칼날 능선' 지점으로, 조난 당시 고 대장은 다른 대원과 로프로 연결돼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고씨는 12일 오후 3시10분께 수색에 나선 헬기에 의해 캠프1이 설치된 매스너루트의 100m 위 지점에서 생사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 누워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다. 그러나 악천후와 일몰로 구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 가운데 이미 11개 봉우리를 밟았지만 고씨의 이름이 산악계에 알려진 것은 3년이 되지 않는다.
농림부 소속으로 13년을 일한 공무원 출신으로 1990년대 초 우연한 기회에 스포츠클라이밍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다른 폐활량을 지닌 고씨는 곧 최고의 기량을 갖추게 됐고 1997년 공무원 생활을 접고 전문 클라이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2003년까지 스포츠클라이밍 아시아선수권을 6연패했다.
고씨가 본격적으로 고산 등반을 시작한 것은 2005년 파키스탄 드리피카(6,047m)에 오르면서부터. 소속사는 고소 적응에 빠른 고씨에게 고산 등반 전향을 권유했다. 이를 받아들인 고씨는 이듬해 10월 초오유(8,201m) 등정을 시작으로 2년 9개월 만에 8,000m급 봉우리 11개를 연속으로 오르는데 성공했다. 2007년 5월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등정했고 올해 히말라야 마칼루(5월 1일), 칸첸중가(5월 18일), 다울라기리(6월 8일)를 올랐다. 당초 2011년까지 14좌를 모두 등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이 속도라면 2010년 완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지금까지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은 한국인 3명을 포함해 14명. 모두 남자이며 여성은 없다. 고씨는 오은선(43ㆍ블랙야크)씨와 함께 '14좌를 완등한 세계 최초의 여성 산악인' 타이틀을 놓고 경쟁해 왔다. 두 사람은 같은 날인 10일 몇 시간 차이를 두고 낭가파르바트를 잇달아 오르는 등 현재까지 고씨가 11개, 오씨가 12개의 8,000m급 히말라야 봉우리 등정에 성공했다. 고씨는 또 최단기간에 14좌를 완등한 산악인 기록을 갈아치울 것으로 기대됐다. 기존 기록은 박영석씨의 8년 2개월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기록 경쟁이 화를 불렀다는 비판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고씨는 한 해에 8,000m급 봉우리를 3, 4개씩 오르는 강행군을 해 왔다. 이를 위해 한 봉우리를 등정한 후 휴식을 취하지 않고 헬기로 다른 봉우리의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속공 등반'을 감행하기도 했다.
유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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