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여파로 최근 부채 상담자가 크게 늘었다. 시중은행 등 규모가 큰 민간 금융기관에서도 부채상담을 해주면 좋겠는데, 급증하는 수요를 혼자 감당하려니 정말 힘에 부친다."
10여년 전 국내 최초로 가계 빚 정리를 도와주는 '부채전문 컨설팅'을 시작한 라의형(46ㆍ사진) 포도재무설계 대표는 요즘 창업 이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빚에 허덕이는 서민은 크게 늘었는데, 가계부채 컨설팅을 도입한 금융기관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라 대표는 "지금까지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은 한결같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며 '재테크'만 강조했다"면서 "그러나 실제 부자가 된 건 서민이 아니라 금융기관이었으며, 오히려 저신용자와 가계파산이 급증한 것은 재테크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꼬집었다.
노동운동가에서 서민금융가로
라 대표가 '돈 안 되는' 부채 상담에 매달리게 된 건 노동운동가 출신인 그의 이력과 관련이 깊다. 충남대 82학번인 그는 대학 2년을 중퇴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그는 서울 구로공단 봉제공장과 현대자동차 등에 입사했으나 '위장취업'으로 낙인 찍혀 쫓겨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그가 서민금융가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1998년. 라 대표는 울산 산업현장의 용접공과 오토바이를 타는 노동자들이 위험률이 높다는 이유로 보험가입 자체를 제한당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가 조사해본 결과, 노동자들의 실제 사고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결국 이 같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험사들과 협상을 벌인 끝에 노동자가 가입할 수 있는 새 보험상품을 만들어냈다. 이 보험을 노동자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노동운동 동료 8명과 함께 세운 보험대리점이 바로 현 포도재무설계의 시초가 됐다.
그는 당시 울산 지역 노동자 6만여명의 높은 대출이자를 놓고 시중은행들과 담판을 벌여, 평균 17%에 달하던 대출이자를 10.5%로 낮추기도 했다. 라 대표는 "노동운동을 열심히 해서 임금이 오르더라도 기존 금융시스템과 개인의 재무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노동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며 부채 상담에 전념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퍼주기 식 지원 도움 안 돼
포도재무설계는 지난 10여년 간 약 5만 가구의 부채 상담을 해줬다. 작년 11월부터는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사회선도기업으로 지정돼 정부의 '부채클리닉' 사업을 전담 운영하고 있다. 상담비용은 초창기 2,000원에서 시작했으나 최근에는 사정에 따라 10만~30만원 정도를 받는다.
라 대표가 유료 상담을 고집하는 것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부채 상담이 어려운 것은 당사자가 재무상태를 자꾸만 숨기려고 하기 때문인데, 경험상 비용을 부담하면 훨씬 적극적으로 상담에 임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정부의 퍼주기 식 서민 지원은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서민이 빚을 지게 된 근본 이유를 해결하지 않고 돈만 퍼주는 것은 결국 재원 고갈만 앞당기는 것"이라는 게 라 대표의 지적이다.
그가 말하는 가계부채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첫째, 사회구조적 원인으로 비정규직 문제 등 불안정한 일자리(소득원)와 치솟는 주택가격, 사교육비 등이 해당된다. 둘째,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과 "노후자금으로 10억원은 필요하다"라는 등의 재테크 환상과 같은 개인적 소비습관이다. 라 대표는 "정부에서 생계비나 창업자금을 지원해줄 때에는 전문가의 재무상담을 먼저 받도록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신용자 전용은행 설립
라 대표는 성공적으로 부채 상담을 받았지만 제도권 금융기관을 이용하기 어려운 저신용자들에게 소액 대출을 해줄 수 있는 개인신용 7~10등급 전용 은행을 3~4년 후 세울 계획이다. 이를 위해 그는 살던 집을 저당 잡혀 대출 받은 돈에 투자금을 보태 14억원을 마련했고, 다음달부터 시범적으로 조금씩 대출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라 대표는 "상환율이 괜찮으면 내년 12월 74억원 정도로 자금을 확충하고, 2012년 말에는 저신용자 전용은행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라 대표는 "가난은 나라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제할 수 있으며, 개인 역시 부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참된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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