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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어린시절부터 모든 집안살림 도맡아 했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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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어린시절부터 모든 집안살림 도맡아 했던 나

입력
2009.07.1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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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나 밑에 와있는데 잠깐 내려와 봐." "아니, 뭘 또 이렇게 가져왔어요?" "고모, 이건 생김치고, 이건 시골 우리 작은 오빠 집에서 가져온 양파고, 그리고 이건 우리 구이언니 집에서 가져온 묵은 김치야."

47세인 나에게 55세 된 올케언니가 20년 넘도록 해오시는 일이다. 올케언니가 직접 만든 반찬에다 언니 친정에서 얻어오는 김치, 채소 등을 늘 갖다 주신다. 당신이 많이 드셔서 그런지 양도 많다. "언니, 고마워요. 이젠 내가 언니에게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계속 얻어먹고 있으니 어떻게 해요. 언니가 50살 넘으면 내가 다 갚으려고 했는데…." "괜찮아, 형편 좋아지면 그때 받을게."

내가 중학교 3학년 무렵 우리집은 남들이 혀를 찰 정도로 힘들었다. 3년 넘도록 암 투병을 하시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군대 간 큰오빠, 고 3인 둘째 오빠, 그리고 나, 초등 6학년인 남동생…. 엄마 병 수발에 지칠 대로 지친 아버지는 작은 농사로 겨우 우리들을 책임지고 계셨다. "형편이 그렇게 어려운데 아이들 학교를 뭐 하러 보내느냐?"는 친구 분들의 비웃음에도 아버지는 어떻게든 우리들을 고등학교라도 마치게 하려고 애쓰셨다.

다행히 이듬해 제대한 큰 오빠가 군대 가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 복직하고, 작은오빠도 바로 대기업에 취직이 됐다. 조금씩 집안 형편이 피면서 나도 여상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고생하던 사람은 좀 살만하다 싶으면 세상을 뜬다고 하더니 엄마는 이런 모습을 보기 전에 일찍 돌아가셨다.

남들은 내가 3남1녀 중 외딸이라고 말하면 "아이고, 귀한 양념 딸이네. 귀염 많이 받고 자랐겠네"라고 한다. 그 때마다 난 속으로 '모르시는 말씀… 우리집에 나 없었으면 큰일났을걸요, 꼭 있었어야 될 딸인걸요. 엄마가 암 투병을 시작하시던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집안 살림은 전부 내 차지였으니까요'라고 말한다.

한참 공부하고 놀아야 할 그런 나이에 주말이면 밀린 빨래 해야지, 김치며 반찬 만들어야지…, 그렇게 사춘기 시절을 어른처럼 지낸 나는 친구들에겐 언니 같은 존재였다. 나의 살림 고생은 고 1때 큰오빠가 우리집안의 구세주와 같은 올케언니와 결혼을 하면서 비로소 끝이 났다.

나는 올케언니 시집오던 날부터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으려 했다. 올케언니는 시동생들 학비라도 보태려고 몰래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언니에게 "집안살림도 안하고 돌아다닌다"고 눈을 흘기며 문을 열어주곤 했다. 올챙이 적 생각은 안하고 철없이 못된 시누이 노릇을 했던 것이다.

큰오빠의 월급 보너스는 고스란히 나와 동생 등록금으로 들어가느라 늘 넉넉지 않았는데도 올케언니는 아무 불평 없이 우리집안을 이끌어 가셨다. 홀로 되신 뒤 부쩍 초라해지셨던 아버지도 언니 덕분에 살도 찌시고 깔끔한 외모로 바뀌셨다. 언니는 친정아버지께서 어릴 때 돌아가셔서 그런지 우리 아버지를 나보다 더 좋아하셨다.

여고 때 생활관에 들어가서 일주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마지막 날은 엄마를 초대하는 날이었는데 엄마가 없는 나를 위해 올케언니가 대신 오셨다. 프로그램 마지막에 엄마들을 앞에 모셔놓고 노래를 부르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언니 또한 그런 나를 보면서 많이 우셨다고 했다.

그 때부터 올케언니는 내게 말 그대로 엄마였다. 내가 시집갈 때도 올케언니는 엄마 없이 시집가는 내가 안쓰럽다며 눈물을 보이셨는데 나는 그저 철없이 좋아서 웃고 다녔다. 큰 애 낳기 10일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한달 동안 내 옆에 머무르며 회복간호를 다 해주셨다.

결혼생활하면서 속상한 일이 있으면 무조건 올케언니에게 전화해서 대뜸 수화기에 대고는 "언니…" 하고 울기부터 하면 "고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놀라시곤 하셨다. 친정 엄마에게 하듯 내가 시댁 흉, 남편 흉 다 털어놓으면 좋은 얘기를 해가며 다독거려 주셨다.

그런 올케언니에게도 갱년기가 온 모양이다. 더구나 몇 년 전 갑상선 수술하시고 자궁종양까지 수술하셨다. 늘 날아다니듯 여기저기서 힘든 일 다 도맡아 하시고, 어려서 공부 제대로 못했다고 방송통신대도 장학생으로 마치는 등 단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시던 언니가 요즘은 갱년기 증상으로 무척 힘들어 하시는 것 같다. 그래도 누구에게 신세 지는걸 싫어해서 혼자 집에서 견뎌내신다.

그러다 우울증에 걸릴까 염려돼서 "우리 가게라도 와서 놀다 가라"고 해도 언니는 "고모에게 신세지기 싫어. 그냥 이겨낼 거야"라고 답한다. "신세는 무슨. 그냥 와. 이제 언니가 보답 받을 차례니까 그냥 받아." 날 키우고 가르쳐서 시집 보낸 뒤에도 반찬까지 다 해다 주셨으니 정말 이제는 내가 갚을 차례다.

그런데도 언니는 내 형편이 어렵다고 나중에 받겠다고 하신다. 얼마 전에도 오래 ?내 침대가 불편해 보였는지 시집 보낼 때 제대로 못해줬다며 기어이 침대와 이불 한 세트를 사주셨다. 오빠는 친구를 좋아해 자주 저녁에 나가고, 조카들은 이제 다 컸다고 늘 비우는 집에서 엄마보다도 더 많은 세월을 함께 해온 올케언니가 혼자 보내시는 모습이 마음 아프다.

가끔 오빠에게 "언니에게 좀 잘해요. 오빠만 혼자 낚시 다니면서 언니 혼자 외롭게 놔두지 말고. 손님 초대도 조금만하고…"라고 하면 언니는 피식 웃으신다. "고모는 어떻게 친오빠보다 나를 더 좋아해? 어떻게 내편을 더 들어주지?" "그럼, 언니 편이지. 오빠는 나빠." "그래도 오빠에게 뭐라 하지마. 다 스트레스 쌓여서 그런 거니까."

생일날에 커다란 선물보다 꽃 한 송이에 더 기뻐하시는, 소녀처럼 순수함을 잃지 않는 우리 올케언니가 빨리 갱년기를 이겨냈으면 좋겠다. 언니, 우리 집에 시집오셔서 베풀기만 하셨으니 이제는 편안하게 보답 받으세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 양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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