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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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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입력
2009.07.1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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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지음/사계절 발행ㆍ340쪽ㆍ1만2,000원

"너 어디 사느냐?" "양주 읍내 삽니다." "나이 몇 살이냐?" "서른다섯입니다." "부모와 처자가 있느냐?" "아버지가 있고 처자도 있습니다." "네 집에서는 농사하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놉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 네 아비는 무엇하는 사람이냐?" "소백정입니다."(<임꺽정> 에서 발췌)

이 책은 벽초 홍명희(1888~1968)의 대하소설 <임꺽정> 을 참고서 삼아 함께 읽는(또는 쓰는) '2009년 한국'의 사회교과서다. 위의 발췌문에서 저자 고미숙이 밑줄을 긋는 곳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놉니다", 요 부분. 저자에 따르면, 임꺽정을 비롯한 청석골 칠(七)두령은 의적이 아니란다. 다 백수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민중과 저항, 역사소설, 리얼리즘 등의 코드로 가득한 무거운 역사의식은 1980년대가 <임꺽정> 에 씌운 족쇄다… <임꺽정> 은, 한 마디로 '백수들의 향연'이다."

고전시가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저자는 자칭 "박사 실업자로 된 지식인 공동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꾸려가고 있는 인문학자다. 이 책은 지난해 겨울 수유+너머에서 <임꺽정> 을 교재로 진행한 강좌를 재구성한 것인데, 비정규직과 백수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마이너'의 존재를 고찰한 내용이다. 백수를 "이 땅의 청년들이 마주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할 실존적 조건"으로 인식하는 저자는 현재 청년백수를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열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임꺽정과 친구들을 '노는 남자들'로 규정한다. 이들은 농사를 지을 땅도, 장사를 할 밑천도, 한 자리를 부탁할 만한 핏줄도 없다. 놀고 싶어서가 아니라 놀 수밖에 없어서 논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간군이 있다. 7~8년씩 대학을 다니고도 70~80%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오늘날의 '88만원 세대'다. 눈칫밥 먹기 싫어 집을 나온 뒤 '임노동'(요즘으로 치면 알바)을 하거나, 소금을 팔러 장돌뱅이로 떠돌거나,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룸펜으로 지내는 '체제의 변경자'로서 칠두령은, 저자의 눈에 88만원 세대의 은유로 비친다.

그러나 저자가 <임꺽정> 에서 읽어내는 것은 결코 패배주의가 아니다. 저자는 칠두령이 "놀면서도 당당하고, 심지어 배울 건 다 배운다"고 강조한다. 이들의 배움은 성공을 위한 것도 아니고, 1980년대의 독법처럼 인민해방을 위한 절차탁마도 아니다. 칠두령의 배움에는 목적이 없다. 이들은 활, 돌팔매, 축지법, 장기의 달인이 되지만, 그건 입시나 취업을 위해 매달리는 오늘날의 공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부란 무엇인가? 존재와 세계에 대한 비전 탐구다… 아주 낯선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것, 이전과는 아주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진정한 우정과 의리, 야생적 사랑과 성도 <임꺽정> 에서 도드라지는 백수의 가치다. 경계와 중심이 없는 자생적 공동체로서의 청석골 또한 21세기 노마드(유목민)를 꿈꾸는 백수들의 대안 모델로 이해된다. 저자는 "마이너들에겐 세상의 모든 길이 존재의 집이자 실존의 현장"이라고 말한다. 인고와 희생이라는 조선시대 여성상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복수에 불타는 여성들, 유교와 불교와 사주명리학이 얽혀 들어가는 스토리도 <임꺽정> 의 진면목으로 독해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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