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처방'이 운위되는데, 세계적 격변을 통찰하는 시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격렬한 대선에 연이은 총선, 촛불집회 등으로 집권세력이 차분히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탄식이, 보수층 안에서도 나온다고 한다. 좀 멀리서 대국을 짚어야 할 언론마저 정쟁에 발목을 담근 형국이다. 이런 추세라면 이명박 정부 시기가 '길 잃은 5년'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세계사적 통찰이 필요한 상황
경제학과 경제정책 면에서, 최근은 세계사적 변화를 겪고 있는 변혁기이다. 1980년대 말 이후 레이거노믹스의 등장으로 보수적이고 통화주의적인 경제정책이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케인스주의적인 재정정책은 교과서에서조차 밀려나고 있었다. 그런데 2008년 미국 금융위기로 이러한 상황은 일변했다. 지금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걱정하는 상황이다. 보수적 재정운용론자들도 정부가 '최후의 구매자이자 대부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 별 이의가 없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대규모 경기부양책과 사회보장개혁을 추진한다 해도 미국경제가 종래와 같은 위상을 되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경제의 지속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과잉소비와 과잉투자에 의존하는 기존의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정부가 나서서 막대한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를 조절해야 한다. 매우 고통스런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미국 국민들이 국가의 역할과 능력에 대해 장기적인 신뢰를 보낼지는 의문이다. 당장 2010년 후반 무렵부터는 미국 중간선거를 계기로 공화당이 시장주의의 반격을 조직화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아무래도 '국가' 대 '시장'의 지지자들 사이에 치열한 대립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세계관의 충돌이 지속 가능한 발전모델의 수립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것 같다.
미국이 후퇴 또는 정체하는 사이 힘의 공백은 중국이 채우고 있다. 중국 역시 미국발 글로벌 위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빠르게 충격을 흡수하고 있다. 작년 말 행한 4조위안의 투자를 포함한 경기부양책이 과감하고 신속했다고 평가된다. GDP 성장률은 2008년 3/4분기 9.0%에서 4/4분기 6.8%, 2009년 1/4분기 6.1%로 하락했지만, 2/4분기에는 8%에 근접했다고 한다. 중국은 올해 1/4분기에 저점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장기적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합의를 이루고 있다. 경제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하는 상황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다. 에 의하면, 수입시장에서는 2013년에, 명목 GDP 총액에서는 2020~30년에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 한다. 중국은 글로벌 위기를 거치면서 세계 제일의 투자자로 부상할 것이며, 10년 후쯤이면 최대의 소비시장으로 부상할 것이다.
미국형 모델이 혼란에 빠진 속에서 중국형 모델은 또 하나의 유력한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은 시장경제로의 이행이라는 역사적 과제는 일단 종료한 것으로 보고 '과학적 발전관'이라는 새로운 발전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를 위해 정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중국형 모델을 경제학의 정통적 계보에 위치 지우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아리기 같은 학자는, 애덤 스미스의 핵심은 정부가 규칙의 수단으로 시장을 이용한다는 것이며, 이는 신자유주의보다는 중국형 모델에서 잘 구현되고 있다고 한다. 발전모델에서 새로운 표준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군사와 경제 분리된 세계체제
중국이 미국에 대한 역사적 대안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아직 중국의 자본시장은 매우 취약하며 현 상태로는 달러체제를 대체할 대안도 없다. 군사력에서는 미국이 세계 차원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패권의 욕망을 자제할 문명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우리 앞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 즉 군사적 중심과 경제적 중심이 분리된 세계체제가 놓여 있다. 그것은 코스모스일 수도 있고 카오스일 수도 있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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