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의 김귀한씨는 지난해 11월 욕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뒤 지금껏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식물인간' 상태다. 6개월째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아들은 "이제 그만 편안하게 보내드리자"고 말한다.
그러나 여동생은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반대한다. 둘의 다툼은 결국 법정으로 이어진다. 원고와 피고로 마주 선 오빠와 동생은 재판장과 배심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열띤 설전을 벌인다.
8일 오전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은평노인복지관 2층 대강당에서 '존엄사'를 주제로 열린 모의재판 현장이다. 최근 대법원 판결과 이에 따른 첫 존엄사 시행에 쏠린 뜨거운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듯, 폭우가 쏟아진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150여명의 노인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다. 멀리 동대문 노인복지관에서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방청객들은 1시간 가량 진행된 모의재판을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저도 자식이며 자식을 키우고 있는 아비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젠 그만 고생시켜드리고 편안히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원고 오빠 역을 맡은 배경례(65ㆍ여)씨가 괴로운 심정으로 말을 이어가자, 일부 방청객은 "그래야지",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면 안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피고 여동생 역할을 맡은 이병희(73ㆍ여)씨가 반론을 폈다. "아직은 아버지가 훌훌 털고 일어나 제 곁으로 오실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가 곁에 누워 계신 것만으로도 저는 큰 힘이 됩니다." 피고의 흐느낌에 방청석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의재판은 은평복지관에서 노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치는 민감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열고 있는 연례행사의 하나다. 2007년에는 '황혼 이혼'을 주제로 모의법정을 열었고, 지난해에는 '노인의 성'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행사를 기획한 황영숙 복지팀장은 "사회적 이슈가 된 존엄사에 대해 당사자인 노인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사회적 합의 과정의 하나라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원래 연명치료중단 소송은 병원과 환자 가족 간에 이뤄지지만 어려운 전문의학용어를 배제해 노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자유롭게 찬반의견을 내놓을 수 있도록 형제간 소송으로 각색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준비 단계에서부터 노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6월 말 공모를 통해 모의재판에 참여할 '연기자'를 모았다. 원고와 피고, 양측 변호사, 원고의 아내와 의사 등 증인 4명, 배심원 10명 등 22명이다. 이들은 사전 교육과 토론 등을 통해 존엄사에 대한 배경 지식을 얻고 각자의 견해를 구체화했다. 이들 의견을 반영해 완성된 대본은 전문가들의 자문도 거쳤다.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정봉현 변호사는 "실제 재판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런 역할극을 통해 노인들이 사전의료지시서나 유언장을 작성할 때 연명치료를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깊이 있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반겼다.
열띤 공방이 이어진 끝에 판결을 내려야 시간. 판결에 앞서 방청객들의 의견을 물었다. 'O', 'X' 가 적힌 종이를 나눠주고 존엄사에 찬성하면 'O'를, 반대하면 'X'를 들어 보이도록 했다. 결과는 존엄사 찬성의 압도적 승리였다. 단 8명만이 반대인 'X'를 들어보였다.
반대표를 던진 방명호(76)씨는 "의사는 신이 아니다. 죽음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며 "의학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생명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찬성 의견을 냈다. 배심원 10명의 의견도 '찬성' 만장일치였다.
배심원으로 참가한 이창규(66)씨는 "연명치료를 통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여전히 병 치료로 고생만 하다가 다시 죽게 되면 소생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장도 배심원의 의견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 연명치료를 중단하라고 판결했다.
이날 모의재판이 끝난 후 그 자리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88명이 설문에 응했는데 존엄사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80명으로 90.9%를 차지했다. 존엄사에 대한 법 제정이 필요하냐는 질문에도 '그렇다'는 응답이 77.2%인 68명에 달했다.
모의재판이 끝난 뒤에도 노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즉석 토론을 벌였다. 김영환(72)씨는 "부모가 소생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면 자녀를 비롯해 20~30명의 친족들이 1명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며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존엄사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3년간 병환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는 이상설(75)씨는 "그때는 어머니가 편히 가시길 바랐지만 막상 돌아가시자 한동안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며 "존엄사가 허용되더라도 자식들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 팀장은 "우리나라 노인들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데 오늘 의견이 찬성에 쏠린 이유도 거기에 있다"며 "죽음에 대해 본인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앞으로 많이 이루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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