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골이 오늘 안장되면 그의 영혼은 편안해지는 것일까.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간을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 상태라고 한다. 이 기간에 정성 들여 재를 올리면 다음 세상에서 좋은 곳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후손들은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49재의 논리다. 안장식에 앞서 열리는 49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은 다음 생을 받게 되는 셈이다.
여전히 엇갈리는 죽음 평가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여전히 분분하다.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저항'이라는 의미 부여와, '역사와 민족에 대해 무책임한 범법자의 자살'이라는 폄하가 엇갈린다. '고통 받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대속(代贖)행위', '더 큰 혐의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 택한 도피행동'이라는 비난이 맞서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미화 지지 향수로 바뀐 것은 동정 때문이지만, 동정과 향수가 정치적 지지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른바 반한비노, 한나라당에 반대하고 노무현과 결별하는 것을 새 노선으로 삼았다가 상주(喪主) 역할을 자임했던 민주당은 이 점을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부시언지(賦詩言志)라는 말이 있다. 시를 읊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는 뜻인데, 대만 국민당 주석을 만난 후진타오 중국주석이 '更上一層樓(갱상일층루)', 천리를 보기 위해 한 층 더 올라간다는 당시(唐詩)의 한 구절을 읊어 양안관계를 발전시키자고 넌지시 말한 것이 부시언지의 사례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은 멋이라도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말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거나 다른 목적이 있다면 위험한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의 묘소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어록이 새겨졌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이 말도 "늘 깨어 있어라, 뭉쳐라"하는 선동으로 들릴 것이다. 최근 갑자기 발언이 많아지고 과격해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원로의 가치와 무게를 환기시키며 제발 조용히 있어달라고 주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지와 향수의 정서를 불온시하고 경계하거나 기피ㆍ외면만 하는 것은 생각이 모자라는 일이다. 대통령의 사과 요구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사과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해원(解寃)까지는 아니라도 답답한 국민들의 소통에 대한 갈증을 해갈해 주는 언급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정치인들이 이런 경우 흔히 쓰는 '부덕의 소치'라는 말도 이 대통령은 하지 않고 있다"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 독재시대라는 말을 듣게 된 배경을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노무현적 가치는 분명히 중요한 민주주의 자산이다. 그 중에서도 탈권위주의의 소탈한 소통 자세, 사회변동에 대한 높은 감수성과 논리, 미래 지향, 이런 것들은 제대로 살리고 이어 민주시민사회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동전의 양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지속적인 편 가르기와 갈등 유발행태, 품격을 잃은 언동 따위는 극복돼야 할 점이다.
그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을
그는 바위에서 뛰어내림으로써 국민들에게 집단적인 죄책감을 일깨우거나 지금의 우리 사회를 전체적으로 되돌아 보게 만들었다. 한국인들은 민주화의 대의와 그 정당성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절차적 민주화, 명과 실이 상부한 민주화는 아직도 멀었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죽음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생각과 입으로 말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영혼에도 안식을 주는 일이며 오늘 열리는 안장식과 49재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어찌 보면 한국사회 자체가 지금 중유의 처지와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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