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 수도 우루무치(烏魯木齊)는 유혈시위가 발생한지 사흘이 지난 8일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지면서 공포와 분노,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헬리콥터 두 대는 상공을 돌며 자제와 냉정을 촉구하는 전단을 뿌렸으며 TV와 라디오는 시위를 멈추라는 호소 방송을 내보냈다. 도심에 배치된 장갑차와,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한 2만여 경찰병력은 철통 같은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우루무치에는 불만 대면 곧 폭발할 것 같은 폭풍전야의 긴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시내에서 5분 정도 떨어진 위구르인 집단 거주지 싸이마창(賽馬場)시장. 이곳의 위구르인은 평소와 다름 없이 일상 생업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기자가 접근해 질문을 던지자 수십명이 모여 들어 억눌린 불만과 분노를 쏟아냈다. "위구르족보다 한(漢)족이 더 많이 죽었다는 보도는 믿지 마라. 한족이 50명 죽었으면 위구르족은 500명이 죽었다." "무장경찰이 총을 쏴 위구르인을 3명이나 죽이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본 뒤 중국인이라는 것이 한스러워 졌다."
"지금 우리가 잠시 숨 죽이고 있다고 해서 사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위구르 정신은 굳건하다." 한 두 사람의 선동만 있다면 다시 시위로 이어질 듯한 화약고 같은 분위기다. 위구르인 40여명은 이날도 시내 중산루(中山路) 인근 남문(南門) 광장에서 기습 시위를 했다.
우루무치의 한족들도 독기어린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날 정오에는 도시 북부의 우루무치 사범대학 인근에서 한족 1,000여명이 위구르족의 테러를 규탄하며 도로를 점거한 채 시위했다. "위구르는 폭도다. 그들을 중국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피는 피를 부른다. 또 다른 피를 막으려면 경찰을 믿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직접 나서 대응해야 한다."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일부 시위대는 거리행진을 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지만 기세가 꺾이지는 않았다. 민족간 분열과 대립이 최고조에 달한 우루무치는 민족의 차이를 넘어선, 중국인이라는 동질적 정서를 이미 상실한 것 같았다.
대학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신장대학을 방문해 기자 신분증을 제시했지만 학내 진입이 거부됐다. 사복 차림의 경찰이, 한 사람 정도 드나들 만큼만 대학 정문을 개방한 채 일일이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가방을 검사했다. 한 중국 공안은 "민족 갈등에 따른 폭력시위가 학내 분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출입을 통제한다"며 "한국 기자라면 이를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종자 가족의 애타는 목소리도 우루무치의 비극을 대변해 준다. 우루무치 FM라디오 방송 94.9의 광보(廣報)99는 이름과 나이, 입은 옷, 인상착의, 주소, 연락처 등을 불러주며 시위과정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실종자 장창(張强ㆍ34)씨의 부인 쉐(許)씨는 "키 174㎝ 정도에 약간 통통한 체격의 남편이 흰색 상의와 파란색 하의를 입고 5일 시내에 나갔다가 그날 오후 8시께 샤오시톈(小西天)거리에서 전화를 한 후 연락이 두절됐다"며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으니 혹시 그를 보았으면 꼭 연락해달라"고 울먹였다. 중국당국은 사망자의 신분과 민족분포 등을 아직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번 유혈사태가 남긴 상처가 너무 깊어 우루무치의 비극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루무치=장학만 특파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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