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담는 개념은 생멸변화한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따라 인권은 다른 성격과 몸피를 지닌다. 지난 세기 약소국 인민의 저항담론이었던 인권이 오늘날엔 강대국의 패권담론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쓰인다. 정치ㆍ경제ㆍ사회적 권리 주장은 급증하고 있는데 인간의 존재는 되레 왜소해졌다.
인권이 '선험적이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이라는 18세기 계몽사상의 수식은, 그래서 인권의 정의(定義)가 아니라 지향(志向)으로 인식된다. 포스트민주주의와 후기산업사회 시대에 도달한 현대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아직도 '가야할 미래'로 남아 있다.
<인권의 문법> (2007)은 조효제(52)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현대 인권 비판서다. 런던정경대에서 사회정책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하버드대 로스쿨 인권펠로우,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기획위원을 지내는 등 한국 및 동아시아의 인권 쟁점을 경험적으로 분석해왔다. 인권의>
그는 "모든 '문법'은 한시적이고 시대와 함께 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책에서도 현대의 인권 개념이 당면한 이론적 긴장과 그것을 수용ㆍ변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인권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의 지적 통로를 마련하는 것"을 자신이 제시하는 문법의 목표라고 얘기했다.
- 근본적인 것부터 묻겠다.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인권의 조건들은 많이 충족됐다. 하지만 현대인이 300~400년 전 인간에 비해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느낀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권 개념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시민권이나 정치적 권리 차원에서 인권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경제권, 사회권 차원에서 인권이 중요해졌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뿐 아니라 먹고 사는 권리도 인권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
'나는 왜 시장에서 배제됐을까' '왜 우리가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도 못 받아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의식이 중요해졌다. 최근 최저임금 수준을 놓고 갈등이 있었는데, 이 수치를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을 나타내는 '표현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최저한의 인간 욕구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라는 것도 인권의 중요한 문제다."
- 현대 사회에 '객관적 인권'이란 가능한가. 하나의 기준으로 이것은 인권에 부합하고 저것은 인권을 침해한다는 관점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66억 인간에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 인권의 단위란 불가능하다. 예컨대 부르카(이슬람권에서 얼굴과 몸을 가리기 위해 착용하는 의복)를 쓰지 않는 것을 '해방'으로 여기는 여성도 있지만, 그것을 쓰는 것을 '문화적 권리'로 생각하는 여성도 있다. 그래서 잭 도널리 같은 학자는 '보편 인권은 어디까지나 인류가 하나의 포부로서 기준을 정해 놓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인권이 각각의 문화와 법률체계 내에서 이해ㆍ적용될 때 일어나는 '번역'의 과정이다. 단일한 인권 개념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이다. 인권 개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각 문화권 내에 존재하는 도덕체계와 융합시켜 전파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코란이나 중국사회주의 이념에도 인권 테제가 포함돼 있다. 그것이 보편 인권과 만나면, 변증법적 변화가 일어난다."
- 상대주의ㆍ다원주의가 지배적이다.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탈근대의 사고방식은 인권의 기반을 약화시키지 않는가.
"맞다. 인권이 현재 맞닥뜨린 가장 큰 도전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지적인 상대주의 앞에 보편 가치로서 인권은 설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인권학자들이 찾은 돌파구는 인권을 철학적 토대를 가진 가치 체계가 아니라 국제적 흐름으로서, 합의된 대세로서 접근하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보호해주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하는 합의로서의 인권이다. 존재론적 기원을 따지면 종교적, 철학적 충돌을 피할 수 없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때도 이 문제가 이슈였다. 그때 택한 길이 '실용주의'다. 선언문을 뜯어보면 세계인권선언이 인권의 철학적 기원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인권을 담보할 국제적 약속임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인권은 경우에 따라 한정하거나 다른 것과 교환할 수도 있는 것인가. 예컨대 연쇄살인범의 인권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제약해도 되는 것인가.
"인권에 대한 대중의 가장 큰 오해가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잘해주자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죄를 지었으면 죄 지은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인권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죄와 형벌의 본질에서 벗어난 부분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인권론자의 주장이다.
인권의 논리는 일종의 마지노선 논리다. 현대 사회에서 인퓽繭遮?개념은 '인플레'된 측면이 있다. 한정과 교환 대상으로 인권을 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권과 이권의 한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을 논할 때도 사실은 인권이 아니라 법익(法益)을 논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현대인이 스스로를 존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의 큰 부분은 금력(金力)에 의한 제약에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팽창이 인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는가.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공권력에 의한 물리적 인권 침해의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경제 구조에서 오는 인권 침해는 커지고 있다. 이 침해는 피해자는 분명히 있으되 가해자는 불투명한 교묘한 인권 침해다. 피해자조차 '내가 못나서 가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구조적인 침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대표적 사례가 광우병이다.
공장형 축산과 육류를 소비토록 만드는 시장 체계는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소비자는 그 위험을 알면서도 쇠고기를 사먹을 수밖에 없다. 또 소비자이기도 한 피해자가 생산ㆍ소비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가해자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침해의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 2009년 한국 사회에서 인권을 위협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는 반공ㆍ개발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휘두르는 전통적인 반인권 세력이다. 둘째는 시장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다. 셋째는 '공리주의적 태도'다. 이것은 고전적 의미의 (공공정책적) 공리주의와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현대의 공리주의는 시장만능주의와 결합하면서 이데올로기적 공리주의가 됐다.
용산 참사에 대한 대중의 싸늘함에서 볼 수 있듯이, 다수의 경제적 이익 속에 소수의 인권 요구가 묵살되고 있다. 마지막은 무거운 주제를 싫어하는 문화적 태도다. 바로 곁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어도 무관심할 수 있는 대중의 태도가 바로 인권의 적이다."
●현대 인권 담론의 논점들
현대 인권 담론의 논점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가장 오래된 논점은 인권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인권의 당위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인권학자들은 인권 개념의 뿌리를 어느 한 철학 사조나 종교가 아니라 인류의 여러 가치체계의 교집합에서 찾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정의론부터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들도 인권을 구성하는 데 동원된다. 그러나 근대 서구의 보편 인권관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논점은 역시 상대주의 대 보편주의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보편주의와 문화상대주의 사이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 논쟁의 전선은 주로 개인의 시민적ㆍ정치적 권리를 강조하는 서구적 가치관과 문화적ㆍ종교적 전통에 부합하는 집단의 복리를 강조하는 개도국 사이에서 형성된다.
스탠리 코언 같은 인권학자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 양성'을 인권운동의 첫번째 사명으로 새롭게 내세우기도 한다. 인권 침해가 맨투맨 방식으로 일어났던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구조적이고 간접적인 형태로 인권 침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적 사실'로서 인권 침해를 규명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대테러 전쟁 등에서 빚어지는 안보와 인권 사이의 긴장감, 경제ㆍ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세계화와 인권의 관계 등도 새로운 논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구속수사 남발 등 사법제도 폐해 지적
●한국출판문화상 박홍규 '법은 무죄인가'
역대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가운데 인권 문제와 관련한 저작으로는 박홍규(57) 영남대 교수의 1997년 제38회 저작상 수상작 <법은 무죄인가> (개마고원 발행)가 있다. 법은>
박 교수는 이 책에서 구속수사 남발, 유명무실한 국선변호제, 노동자를 오히려 억압하는 노동관계법 등 사법제도의 여러 문제를 법학자의 예리한 시각으로 파헤쳤다. 박 교수는 수상 당시 "우리 사회에서 아직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인권이 하루빨리 정착, 확장됐으면 좋겠다"고 저술 의도를 밝혔다.
그는 또 "시민단체의 사회참여를 막는 현행 법체계와 비대한 검찰조직의 개혁 없이는 법의 근본 이념인 인권을 보장할 길은 막막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한국출판문화상 상금 500만원을 구속 중인 인권운동가를 돕는 데 사용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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