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소셜 디자이너'를 꿈꾸는 박원순 변호사는 지역이 오로지 희망이라고 외쳐온 사람이다(김수종 저,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추천사). 분권과 참여, 자치가 국가발전의 필수적 개념이고 오늘의 시대정신이 돼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그가 이끄는 희망제작소가 출범 8개월 만인 2007년 11월 관 냄새가 물씬 풍기는,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산하 지역진흥재단이 설립한 지역홍보센터의 위탁운영 계약을 맺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다음의>
희망제작소-박원순씨의 낭패감
당시 희망제작소는 인력 채용공고를 하면서 지역홍보센터가 특산물과 관광 정보 제공 지역브랜드를 강화하고 지역마케팅의 광장 역할을 하는 곳으로서 소통ㆍ공감ㆍ어울림이라는 지역진흥재단의 설립취지에 맞춰 민관 파트너십의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3년 계약으로 한창 궤도에 오르던 이 사업에서 희망제작소는 1년여 만에 손을 떼게 됐다. 정부가 지난해 말 돌연 계약해지를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희망제작소는 2007년 7월 하나은행과 손잡고 퇴직자 청년실업자 주부 등을 대상으로 소기업 창업을 지원하는 '한국형'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을 벌인다고 발표했다. 무담보 소액 신용대출 위주의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모델 대신, 실질적 자립을 뒷받침하는 소기업 창업 지원에 집중키로 했다는 설명이 뒤따랐고, 희망제작소 안에 이를 담당할 '소기업발전소'도 만들었다.
총 320억원을 출연하기로 한 하나은행 역시 단순 소액대출을 지양하고 서민층이 실질적으로 자립기반을 갖출 수 있는 소기업 창업지원에 초점을 뒀다고 '한국형'에 의미를 부여했다. 2개월 뒤 도하 언론에는 우선 100억원으로 시작하는 '하나희망재단'의 출범을 알리는 큼지막한 사진이 실렸다.
앞서 하나은행은 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해 창업 중심의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을 위한 재단 설립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민단체와 금융권의 사회공헌사업이라 해도 기업창업 지원 출연금은 세제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세법 조항 때문이었다. 희망제작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관계 당국을 백방으로 찾아 다니며 사업취지를 설명했고 마침내 정부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길을 찾아냈다.
그런데 올 1월 하나은행장이 이사장인 하나희망재단 이사회가 희망제작소와의 공동사업 안건을 부결시켰다고 통보해왔다. 소규모 창업지원의 세금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 않아 '방글라데시형' 소액대출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오비이락 격으로 1개월 뒤 하나은행은 한 보수언론이 주관하는 '탈출! 가계부채' 캠페인의 후원자로 참여했다.
박씨가 최근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이 정부에 배제의 정치를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사령부가 있다고 본다"며 국가정보원을 지목하면서 예로 거론한 희망제작소의 역점 사업의 무산 전말은 이렇다. 희망제작소 실무진은 이런 사정을 전해주면서, 그러나 박씨가 어떤 경로로 국정원을 지목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행정안전부와 하나은행은 펄쩍 뛰었고 국정원은 박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열을 올렸다.
하지만 세상에는 '합리적 의심'이라는 게 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격언은 여기서 출발한다. 박씨가 주변을 어렵게 할까 봐 논란 확대를 꺼리는 것은 아쉽지만 평소 사려 깊은 성품으로 비춰 허튼소리를 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그는 발언이 낳을 파장을 우려하는 대목에서 오히려 "내 말이 주목 받기를 바란다"며 민간사찰이란 용어도 동원했다. 가슴 뜨끔한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닐 게다.
중도ㆍ서민 담을 그릇을 키워야
이번 사안을 보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생활 속의 개혁적 시민운동을 표방하며 희망 대안 창의를 중시하는 희망제작소 정도의 중도단체마저 권력이 소통을 거부한 흔적이 짙다는 점이다. 권력의 포용 그릇이 그렇게 작다는 얘기다. 최근 정권은 중도 강화론을 앞세워 마이크로 크레딧 확대 등 서민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사업주체의 적격성 잣대는 능력과 성과를 떠나 '우리 편이냐 아니냐'일 뿐이다. 그런 협량과 오염이 의심 받지 않으면 더 이상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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