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로부터 내가 살아 온 길에 대해 연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내가 그런 글을 쓰기에 적합한 사람인지도 의문이고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황이어서 망설였지만 숙고한 끝에 그러겠다고 용기를 냈다.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내 세대는 특별한 의미가 있고 가난과 역경을 딛고 살아 왔기 때문에 이것을 한번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주에 가면 백제 25대 무령왕(461-523)의 능이 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이 공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오래 전에 나는 그곳을 찾아 1500년전에 쓰던 다리미 등잔 인두 등 일상용품들이 어쩌면 내 어려서 쓰던 것과 그렇게 같을 수 있을까 하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다리미는 숯을 쓰고 자루가 달린 것인데 다만 자루가 나무가 아니라 쇠로 되어 있는 것만 달랐고 인두는 그 대로였다. 등잔은 작은 종발에 들기름을 넣고 솜 심지를 넣어 불을 밝히는 것인데 6·25전쟁 중에 우리 집에서 쓰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한 마디로 1500년 동안 우리들의 생활방식이나 수준은 거의 정지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 한다.
여기 비한다면 내 세대의 삶은 가히 천지개벽이라 할 만하다. 1000년 넘어 지속된 주판문화가 내 세대에 컴퓨터 문화로 바뀌었으니 나의 한 세대가 이룩한 변화는 지난 날 1000년 이상의 변화에 해당하는 것이고 우리가 지금 80년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 이상 사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한 격동의 변화를 나는 가난과 고난의 환경에서 맞았다. 그 동안 정치는 식민지배, 독재와 갈등의 연속이었고 경제는 혼란과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난 70년을 하나의 필름으로 엮어 놓고 보면 우리 모두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큰 성공의 드라마임이 분명하다. 나는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지켜본 세대의 한 사람이라는데 자긍심을 갖는다.
나는 경제발전론을 전공했으며 특히 영국 산업혁명이후 250년간 각국의 경제근대화 과정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전개되었는가를 비교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만큼 역동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250년 미국에서 200년 그리고 일본에서150년 걸린 산업화 과정을 우리나라에서는 나의 한 세대동안에 해낼 수 있었다. 한국의 역동성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모방이익을 극대화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들이 밟아간 중간 과정들을 생략함으로써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동적 변혁기에 나는 주로 대학교수로서 사회활동에 참여 하였는데 이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대결과 혼란을 지켜보면서 정치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이것을 내 평생 일관되게 지켰다.
그 대신 나는 우리의 가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래서 경제학 교수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개발과정에 필요한 두뇌집단이 대학교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정치적 격변에 따르는 위험을 지지 않으면서 대학교수로서 경제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학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박정희 정부에서는 서울신문 논설위원, 전두환 정부에서는 금융통화위원, 노태우 정부에서는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과 건설부 장관, 김영삼 정부에서는 대한 주택공사 이사장, 그리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는 한국은행 총재로서 국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 하는 행운을 누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큰 것을 기대한 일이 없으며 내 소망은 평범한 것이었다. 어려서는 고등학교 졸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에서는 대학을 갈수 있을까, 그리고 대학에서는 오랜 꿈이었던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기대했던 것 보다 늘 더 좋은 결과를 얻어 왔던 것 같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본 일이 있다. 내게 고비마다 행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내 꿈을 제약했던 것이 고난의 환경이었는데 이 고난을 하나하나 뛰어 넘고 보니 더 큰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연재물을 '고난 속에 큰 기회 있다'라는 제목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또 한 가지를 말한다면 내 개인의 이익보다 전체 사회이익을 우선하려는 노력의 덕도 있지 않나 싶다. 예컨대 나는 종합부동산세를 내야 하는 당사자였지만 종부세의 무력화가 옳지 않다는 것을 끝까지 주장 했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지금부터 써 갈 것이다.
이제 내 나이 일흔 셋, 2006년 한은총재 임기를 마친 후, 후선에 물러서 있다. 봉사활동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현실문제에 鰥㈓?않으려 한다. 나이든 사람들은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과거 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쉽고 그래서 현실문제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우리 사회발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슬하에 2남3녀 5남매는 모두 독립해 나갔고 우리 내외는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11명의 손 자녀들이 자라는 모습과 재롱을 지켜보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벅찬 일과이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시 바빠지는 것이 내겐 부담이자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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