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대답하기가 난처하다. 대의명분 있는 뚜렷한 계기가 있어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다면 멋도 있고 질문 한 사람도 만족시킬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단히 개인적인 이유로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됐으니 말이다.
나는 경남 밀양에서 가장 높은 종남산과 덕대산이 만나는 산골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세상이 바뀌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때는 다들 가난했기에 가난을 들먹이는 건 진부하기조차 하나 가난은 어린 마음을 크게 아프게 했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밥알 구경이 어려웠고 나물로 밥을 대신했다. 무엇보다 춘궁기에 벼 한 섬을 빌리고 가을에 한 섬 반을 갚는 '장리' 빚을 매년 얻는 것을 보고는 저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까 싶어 부모님이 원망스럽고 또 폭리를 취하는 사람이 밉기도 했다.
겨울이면 형님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이런 일로 발바닥이 쩍쩍 갈라져 거기에 뜨거운 촛물을 집어넣으며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고통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시대정신처럼 된 때였으니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내가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고 바랐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도 컸을 것 같다. 선친께서는 산골동네 접장으로 동네 청년들을 가르쳤는데, 유방과 항우, 사명당 등에 관한 말씀을 많이 했다. 어릴 때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유방의 지략이나 항우의 역발산 기개세하는 힘, 사명당의 신통술을 가지게 되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도인이나 장군이 되고 싶었으나 도인이나 장군을 찾아 집을 나설 용기와 인연이 없었다. 그래서 권세가 큰 줄로 알았던 판검사가 되어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소박한 꿈에 불과했으나 꽤나 강렬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반정부적인 생각과 함께 세상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부터였다. 농협에서 양계자금을 대출 받아 닭을 먹였는데, 병아리를 사들일 때의 계란 값은 11원이었으나 닭을 키워 계란을 낳을 때는 6원 정도 해서 더 이상 닭을 먹일 수 없어 내다팔았는데, 닭 판 돈으로 빌린 사료 값 갚고 남는 것은 농협에 진 빚뿐이었다. 분통이 터졌다.
비료의 과잉생산으로 인한 가격인하를 막기 위해 농협으로 하여금 비료를 독점 판매케 하면서도 온상 농가들이 한 부대에 900원 하던 요소비료를 2,500원에 사 쓰는 것을 보면서 분노했었다.
또 정부가 양잠을 장려해 밭에다 뽕나무를 심었는데 곧바로 생사 수출이 중단되어 뽕나무를 다시 뽑아내며 한숨짓는 모습을 보면서 정부를 한없이 원망했다. '정치를 잘못해서 국민이 살기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최근 들어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살기가 좋아졌다며 박 대통령을 칭송하는 경우가 많다.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잘했다는 것이고, 독재가 불가피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박 대통령을 반대한 민주화투쟁은 잘못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망각의 산물이고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시대상황에 힘입어 경제를 성장시킨 점은 있지만 생존마저 어려운 서민대중이 부지기수였고 국민의 공분을 산 특혜와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이 살기 좋았다면 '광주대단지' 민란은 왜 일어났으며,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헌법 개정 청원조차 처벌하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왜 만들었겠는가? 지금도 그 업보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내가 민주화운동에 나선 것은 역사의식이나 사회과학지식 때문이 아니었다. 지극히 사적인 동기로서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이 모두 잘 살게 하고 싶어서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선거유세 같은 데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부모형제와 처자를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기 부모형제와 처자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국민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이런 생각은 결국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랑의 원리와, '진실로 내 부모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정치에 나서게 된다'는 정치철학의 단초가 됐다.
나의 이런 말을 우리 부모형제나 일가친척이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돈 한 푼 벌어다 준 일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구속이나 수배 등으로 온갖 피해와 걱정을 끼친 데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형수나 조카들로부터 용돈을 받아오면서 말이다.
이처럼 민주화운동이나 ㅔ″갠옜?참여한 동기가 사회적인 데 있기보다 개인적인 데 있었기 때문인지 나의 경험이나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가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말하자면 '만물의 척도는 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사회풍조에 편승하거나 사회과학지식에 얽매이지 않은 편이다.
1980년대 들어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이 밀물처럼 운동권을 덮쳐도 이에 휩쓸리지 않고 내 나름의 새로운 진보이념을 주창한 것이나, 1991년도에 낸 저작집 '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 서문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이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상당히 부끄러울 수 있는 민주화운동의 참여 동기가 결과적으로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을 주체적으로 하게 한 토대가 된 것도 같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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