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이가 이번엔 사고를 칠 줄 알았는데 또 꼴찌네." 김동철 기수의 목소리엔 힘이라곤 없었다. 지난달 21일 경기 과천시 서울경마공원에서 9마리가 출전한 가운데 펼쳐진 국산 5군 1,800m 경주.
그가 기승한 '감동의 투혼'은 출발 이후 내내 8위에 머물다 결승선 주로에서도 힘 한 번 못 써보고 꼴찌로 처졌다. 그렇다고 경주를 마치고 가슴이 터질 듯 가쁜 숨을 내쉬는 말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를 제대로 유도 못해서 미안하다. 안 다치고 완주해줘서 고맙다." 김 기수는 서운한 마음을 누른 채 투혼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날 단식(1등마를 맞히는 베팅 방식) 베팅 금액 3,060만원 중 '감동의 투혼'에 걸린 돈은 고작 101만원이었다.
38전 38패, 승률 0%. 2006년 12월9일 데뷔전을 치른 이후 투혼이의 성적표다. 지난해 이후만 27전 전패로, 현재 과천벌에서 뛰고 있는 마필 1,554마리 가운데 최다 연패다. 지난해 4월 처음으로 두 차례 2등한 것이 최고 성적이다.
'우르르~ 쾅쾅.' 2일 새벽 훈련이 한창인 과천 경마공원 경주로에 고막을 찢는 천둥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한 경주마가 천둥소리에 놀라 요동치는 바람에 기수가 낙마하기도 했다. 오전 7시께 투혼이가 경주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 봐요. 다른 말보다 발걸음이 힘차고 경쾌하죠." 지용철 조교사가 말을 건넸다. 그는 투혼이가 소속된 마방(馬房) 49조의 '감독'이다. "그런데 말이죠. 실전에만 나가면 우리를 속인단 말이에요." 못내 아쉬운 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는 투혼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습보(전력질주) 등으로 4,000m 가량 연습을 마친 투혼이는 짚풀 냄새가 가득한 마방으로 돌아갔다. 안장을 벗기자 훈련 중 쏟아낸 땀이 어느 새 흰 소금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다리 근육과 목덜미에도 핏줄이 울퉁불퉁 선명하게 섰다.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기자 김이 모락모락 났다. 달콤한 휴식을 마친 뒤 낮에는 워킹머신과 수영으로 담금질이 이어졌다.
꼴찌마 투혼이는 부마(父馬)인 '포트스톡턴' 가문에서도 못난 자식이다. 11일 먼저 태어난 형 '제이에스홀드'는 2007년 코리안더비 등 3대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최초의 '3관마'다. 2006년 8월 데뷔해 지난해 10월 은퇴할 때까지 10전 9승으로, 상금만 5억7,000여만원을 기록했다. 두 살 터울 남동생 '남도제압' 역시 올해 코리안더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경마에서 성적은 곧 생명이다. 성적이 우수하면 씨수말 등으로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지만 속칭 '똥말'들은 마차를 끌거나 육용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특히 요즘은 후보군 망아지들이 데뷔를 앞둔 시기라, 자칫하면 방을 빼야 할지도 모른다.
성적으로는 마방의 애물단지일 법도 한데 마방 식구들은 되레 투혼이를 감싼다. 경주마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꼴로 출전한다. 한 경기를 마치면 몸무게가 10㎏ 이상 빠질 정도로 체력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혼이는 지난해 한해 동안 무려 17차례 출주해 과천벌 최고의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투혼이의 미덕은 이 뿐만이 아니다.
"꾀를 부리지 않아요. 성적이 월등한 마필과 함께 훈련을 시켜도 발걸음이 결코 뒤처지지 않아요." 2년 동안 투혼이를 지켜봐 온 이찬구 관리사의 칭찬은 계속 이어졌다. "질주하려는 의지가 고삐를 통해 그대로 전달돼요. 결승주로만 들어서면 흥분해서 숨이 떨어질까 무서울 정도로 승부욕도 강하죠."
지용철 조교사도 "자기 밥값은 하는 녀석"이라며 애정을 보였다. 순위권엔 못 들어도 6등, 7등이라도 해서 수십 만원은 벌기 때문에 한 달 '하숙비' 100만원 정도는 낸다는 말이다. 그는 "고작 1승하고 몸져 눕는 억대 마필보다야 훨씬 낫다"고 했다.
최근 투혼이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사건이 생겼다. 옆방 동료이자 5세 동갑내기로 역시 38전 전패 기록을 보유한 '투더챔프'가 첫 우승을 한 것이다. 투혼이가 꼴찌에 머문 지난달 21일 바로 그 경주였다.
결승선 50m를 남기고 앞서 가던 4마리를 차례로 제친 것이라 더 극적이었다. 대기실 TV를 통해 경주를 지켜보던 마방 식구들은 "머리(1등)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주도 목장에서 소식을 접한 김선식 마주는 "인터넷으로 봤는데 이게 진짜인가 싶더라"고 했다. 그는 수십만원짜리 연골 강화 영양제를 하사했다.
사흘 뒤인 24일 마방에 비보가 전해졌다. 투혼이의 38전 중 27번이나 호흡을 맞춘 김동철 기수가 훈련 중 마필 충돌 사고로 척추 부상을 당했다. 김 기수가 타고 있던 '행복한 주말'은 부상이 심각해 안락사 됐다.
김 기수는 병상에서도 투혼이를 향한 응원을 잊지 않았다. "투혼이는 내 피붙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만큼 뭔가를 보여?거라고 믿어요."
대표 꼴찌마이자 최고의 강철마 '감동의 투혼'은 이날 새벽 훈련을 맡은 윤영민 기수와 함께 5일 다시 경주로에 선다. 곽태훈 마주는 "투혼이가 이름값대로 '투혼'을 발휘해 '감동'을 전할 날이 꼭 올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장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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