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가득 머금은 하늘이 바람길을 막고, 맑은 햇빛이 없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니 가슴이 답답하다. 직장 다니는 후배들이랑 '번개'(예고 없이 갑작스레 '번개치듯' 만남)를 쳤다. 마침 지인이 한성대역 근처에 떡볶이 집을 열었다 하여 먹을 것, 마실 것 많은 삼선교에서 모이기로 했다.
더위와 스트레스에 지쳤던 친구들이 초저녁부터 하나 둘 모여들더니, 급기야 우리는 열다섯명으로 불어났다. 아담한 떡볶이집에서 늦게 오는 이들을 기다리며 시장기를 면한 다음, 맞은편 치킨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라이드치킨 반, 양념치킨 반에 골뱅이 소면, 그리고 500짜리 호프 한 잔씩!을 외치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열다섯명의 모임은 대충 테이블 세 개에 앉을 수 있었는데,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를 기다리며 수다 판이 펼쳐졌다. 남자친구 이야기, 남편 이야기, 직장의 악마(?) 상사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 가릴 것도 부풀릴 것도 없는 진솔한 이야기판이었다.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몇 모금씩 마시고, 치킨이 한 조각씩 줄어들고, 골뱅이 없는 소면이 통통하게 불어갈 즈음에도 우리의 수다는 그칠 줄 몰랐다.
'딱 맥주 한 잔만!'의 취지로 모였기 때문에, 슬슬 일어나자고 부추기던 나는 일행을 끌고 지하철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50여미터 걸었을까? 골목 저 끝에 곱창볶음을 먹는 길거리 실비집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아….
"저기 잠깐 들렀다 가야겠다"고 말한 사람은 귀가를 재촉하던 나였고, 마무리가 미진하던 차에 좋다면서 모두들 간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다섯 명은 먼저 가고, 열 명이서 곱창볶음을 안주 삼아 소주 딱 두 병으로 즐거운 마무리를 할 수 있었는데.
"이모, 우리 지금껏 치킨을 먹고 와서 주문을 많이 못해요." 양해를 구했고, 실비집 주인장은 5,000원짜리 한 장 드리기 민망할 정도로 까만 프라이팬이 넘칠 만큼 많은 양을 불 위에 척 올려 주셨다. 양배추를 잔뜩 썰어 넣어 늦은 밤 먹기에 걱정이 덜했다.
아삭하게 설익은 양배추랑 잡냄새 안나는 야들한 곱창을 한 입, 여기에 차가운 소주 반 잔을 털어 넣고 앉아, 살살 부는 밤바람까지 맞으니 지난 몇 주간의 짜증이 절로 풀렸다.
찾아온 친구들을 위해 구슬땀 흘려가며 만들어 준 떡볶이, 치킨과 생맥주, 곱창볶음에 소주 한 잔은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 '미슐랭(michelin)'에서 알아주지는 않지만, 나에게만큼은 쓰리 스타가 아깝지 않은 메뉴들이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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