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모님께 혼나거나 큰 잘못을 저질러 잠시 숨어야만 할 때, 나만의 공간으로 다락, 장롱 속, 장독대 같은 곳 하나쯤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삼대가 한 집에 살아도 소통은 물론 각자의 공간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방과 가족의 숫자가 비슷한 세대들이 나오더니, 요즘은 방의 숫자가 세대원의 숫자를 능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전에 비하여 개인공간이 늘었지만 사생활이 더 많이 보호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프라이버시 침해에 관한 논의가 지상을 달구는 까닭은 왜일까?
인터넷이 빼앗아간 은신공간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른 문화적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로 인터넷을 들 수 있다. 현대인은 인터넷을 매개로 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은데, 그 공간은 우리에게 더 이상 다락이나 장독대와 같은 은신처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잡한 도심의 대형서점을 찾지 않더라도 책을 검색하기 쉽고 가격도 할인해 주는 인터넷 서점이 인기를 끈 지 오래되었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면 귀하가 봐야 할 책이라고 추천하는 화면이 뜬다. 평소 그 사이트에서 구입한 책으로써 구매자의 성향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맞춤형 서비스다. 편리하기도 하지만, 가끔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맞춤형 서비스가 요즘은 맞춤형 광고로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면 좌우에 많은 배너광고가 있다. 대부분은 나와 관계가 없거나 관심이 없는 제품과 회사에 대한 광고들이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처럼 평소 내가 즐겨 방문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나의 성향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배너 광고를 붙인다면 광고효과가 더욱 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개인별 맞춤형 광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는 쿠키(Cookie)라는 간단한 인터넷기술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 인터넷 사용자가 어떤 웹사이트를 방문할 경우 그 사이트가 사용하고 있는 서버에서 인터넷 사용자 컴퓨터에 쿠키라는 작은 기록정보파일을 설치함으로써, 인터넷 사용자의 해당 웹사이트 방문기록이나 구매물건 등에 관한 정보가 저장된다. 쿠키에 저장된 정보와 웹 서버에 저장된 정보데이터를 결합하면 인터넷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비성향 등이 분석될 수 있다.
정보 집적이 소비자에게 편리할 수도 있지만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인터넷 상에서 다닌 곳이 모조리 추적 당하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가족이나 회사 동료들이 같이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소비성향 외에 숨기고 싶은 정보까지 들키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정부나 공공기관에 의해 개인정보가 무분별하게 수집 관리되는 것을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Big Brother로 비유한다. 인터넷포털, 이동통신사, 대형 할인마트 등 대기업에 의한 무분별한 개인정보 수집과 동의 없는 활용을 Little Brothers에 의한 침해라고 하기도 한다.
내가 방문한 인터넷 사이트와 읽은 기사들을 가지고 정부(Big Brother)가 대기업(Little Brothers)의 도움을 받아 가상공간 속의 '나'를 만들고 이를 법정에 세운다면, 카프카의 소설 <심판> 에 나오는 K처럼 그게 내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악몽을 꿀지도 모른다. 심판>
<1984년>보다 무서운 우리 사회
범죄에 대한 직접 증거가 아닌 어떤 성향을 입증하기 위해 이메일을 그것도 몇 년 치를 뒤지고 그것을 수사결과 발표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하는 사회는 오웰의 <1984년>이나 카프카의 <법정> 보다 더 무서운 곳이 아닐 수 없다. 법정>
나만의 다락방 문이 뜯기고 장독대 아래 편에 몸 하나 숨길 만한 응달마저 빼앗긴다면 차라리 문명을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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