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던 두 주 전 주말에 벗들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 우리집에 왔다. 뒷마당에 차일을 치고 빗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광장시장에서 사온 빈대떡 재료를 부치고 통인시장에서 사온 꽁치를 구웠다. 요즘 꽁치는 싱싱한 놈 세 마리가 2,000원. 맛도 좋다. 비구름에 멀리 북한산이 아예 숨어버린 것은 아쉽지만 술자리에 정경이란 옆에 있는 이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듣다가 힐끗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니. 밤이 되어 다들 간다기에 버스를 타기 전 동네 청운공원으로 데려갔다.
평소 거기서는 남산첨탑도 보이고 한강에서 불꽃놀이를 하면 그것도 조금은 보였다. 종로부터 세종로, 시청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헌데 이곳도 비안개로 가려져 야경이 시원찮았는데, 유독 자동차 불빛으로 휘황한 차로가 두드러졌다. 그러니까 저기가 정확히 어디냐고 벗들이 물었다. 나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동네에 살면서도 불꽃놀이 소리가 펑펑 울리면 그 때나 이곳으로 단걸음에 뛰어온 몇 번이 고작이었으니. 동네를 좀더 걸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
북악산 기슭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한강변에 살았다. 강남으로 불리는 아파트 동네였다. 가끔 한강변을 걸었다. 오래된 강변에는 여름이면 능소화가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억새가 폈다. 풀숲에는 딱새들이 숨어있다가 축제날 풍선처럼 짝자그리 날아오르곤 했다. 아파트 단지도 오래 되어서 눈높이는 아름다웠다. 봄이면 사과꽃 벚꽃이 무리로 피었다. 얼마 전 버스로 지나면서 보니 한강둔치에 아름답던 숲이 사라졌다. 오세훈 시장이 '한강르네상스'를 한다며 돈을 쳐발라 오래된 숲을 다 정리했다. 세월로만 이룰 수 있는 아름다움을 단숨에 치워버리는 그런 야만스런 미감이 어떻게 르네상스일까.
지금 사는 동네는 산등성이에 있다. 골목을 휘돌아 단독주택들이 이어진다. 요즘은 이런 고졸한 맛이 좋다고 관광객처럼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박한 맛을 사랑한다니 고맙다. 이 소박한 맛을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모아주기 바란다. 이 먼 동네를 한번 걷는다면 364번은 당신이 사는 동네를 걸어주길 바란다. 그곳에도 오래된 아름다움이 필경 있다. 그걸 지켜주길 바란다.
제주도 올레길은 한국에도 아름다운 순례길이 있다는 걸 일깨워주었다. 지리산에 둘레길이 생기고 오대산의 지방도로가 차량통행을 금지하고 걷는 길이 되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풍광 좋은, 걷는 길을 만드는 데 나섰다. 좋다. 헌데 너무 과열이다.
최근 제주도 무릉 곳자왈의 올레길을 다녀온 출판인 황영심씨(지오북 대표)는 숲속의 잔디밭이 다 까졌다고 안타까워 했다. 보통 숲이 우거진 곳은 그늘이라 잔디가 자라기 어려운데, 이곳은 숲이 좋으면서도 잔디까지 다복해서 작년에 생명의숲에서 '아름다운 숲길'로 선정되기도 했다. 생명의숲 전문위원으로 아름다운 숲 심사에도 참여했던 그로서는 대책이 고민될 일이었다.
올레길을 여는 날, 2,000명까지 몰렸다니 잔디가 까지는 것은 당연했다. 지리산 둘레길에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전남 담양 창평마을은 구불구불 골목길이 아름답다고 슬로시티로 지정했더니 관광객이 늘어난다고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오래된 담장을 무너뜨렸다. 순례조차 소유처럼 욕구가 되는 사회에서는 오래된 아름다움이란 그저 관광이라는 돈벌이 도구로서나 유용하다.
순례도 과열하면 자연파괴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관리들, 22조2,000억원을 들여서 4대강 주변을 갈아엎겠다는 정부는 무서운 것이지만 제가 사는 곳에서 오래된 거리, 부들이 자라는 늪이 사라져도 집값, 땅값이 오르는 것만 좋다는 이들이 이런 정책을 떠받쳐주고 있다. 이제라도 동네를 산보하자. 동네 수퍼에서 조금 웃돈을 주고 물건을 사자. 그게 실은 차를 끌고 멀리 마트로 가서 물건을 사재기하는 것보다 절약도 된다.
서화숙 편집의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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