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일을 말하면 귀신도 웃는다고 합니다. 미래를 예측하거나 예언하는 일이 얼마나 '어림없는 일'인지 실감하게 하는 말입니다.
사실상 미래는 미지(未知)로 특징지어집니다. 어제는 겪어 압니다. 오늘도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어 그래도 꽤 압니다. 하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깜깜합니다. 아직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분명한 것은 '경험한 것'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겪어 아는 과거나 오늘에만 머물지 못합니다. 익히 또는 제법 아는 차원에서 안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미래를 향해 치닫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내일을 알아야 하고, 미지를 직면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두려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삶은 소극적으로 말하면 늘 무모한 '도전'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창조적인 '감행'으로 묘사됩니다. 삶은 이러합니다.
그런데 미지인 미래가 삶이 필연적으로 부닥쳐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면, 그래서 지금을 지속한다든지 어제를 지니는 일만 가능하다든지 한다면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은 사뭇 달랐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어제를 인(因)으로 여기고 오늘을 그 과(果)로 여겨 이를 통해 알지 못하는 내일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루어 짐작하는 앎'은 없고 '직접적으로 취득한 확실한 앎'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지한 사고(思考)란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각적인 행동만이 삶의 격률(格率)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미래를 그리면서 어떤 꿈을 꾼다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 꿈꾸기가 있다 해도 어리석은 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다만 미지에의 좌절이 빚는 의식의 파행 현상쯤으로 여길 것입니다. 미래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조차 게으른 삶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직면한 사태에 대한 무지가 빚는 소심한 방어 기제입니다. 이미 겪고 익힌 사태만이 펼쳐지는 마당에서 그러한 태도가 성숙한 행태일 까닭이 없습니다. 따라서 상상력은 마땅히 심각한 질병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자기 기만적이고, 그래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현실 속에서 타기해야 할 천박한 도덕을 들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희망일 것입니다. 희망이란 미래를 준거로 할 때만 가능한 덕목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겪은 과거와 겪고 있는 지금 뿐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내일을 그리는 희망을 지닌다는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의 바탕을 없애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정황에서 요청해야 할 사유 틀이 있다면 그것은 회상이고, 기려야 할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회한(悔恨)입니다. 그리고 그 회한의 실천적 윤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겼거나 획득했던 것으로 회상되는 것을 어떤 일이 있어도 빼앗기지 않기, 그리고 졌거나 잃은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이를 악물고 되찾기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바로 그 회한을 지고한 도덕으로 삼고 있는, 어제와 오늘만 있고 내일이 없는, 그래서 희망을 도무지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주 전에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가 우리나라를 다녀갔습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방글라데시에서 절대 빈곤자에게 무담보 소액대출을 하는 그라민은행(Grameen Bank)을 세워 성공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온 세계가 가난과 경제, 인간과 제도에 대해 근원적으로 되살피게 하는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는 분입니다. 이 일로 그 분은 2006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하는 일을 여기에서 자상하게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주장하는 세 가지 사항을 꼭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가난에 대한 그의 인식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가난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빚은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그의 신뢰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꾸어간 것을) 언제나 되갚는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통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행을 시작하면서 27 달러씩 42 가구에 꾸어주었는데 지금은 750만 명에게 7억 달러를 대출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결과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자신의 희망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2030년까지 가난박물관을 세우겠다. 그렇게 해서 우리 자식들이 그 박물관에서 자기 조상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 배우게 할 것이다.' 이러한 말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제도를 이겨냈다. 인종차별도 이겨냈다. 달에 사람도 보냈다. 그런데 가난을 이겨내지 못할 까닭이 있는가?'
우리는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속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그 속담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꽤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산길을 홀로 걸을 때 만날까 두려운 것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속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앞서 지적했듯 우리는 '내일 일을 말하면 귀신도 웃는다'는 속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일을 말하면서 살아와 마침내 오늘 이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습니다. 유누스의 가난에 대한 인식과 가난한 자에 대한 신뢰와 미래의 꿈을 들으면서 그것이 조금도 낯설지 않은데, 우리도 그 분이 하고 있는 모습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그런 일들을 마찬가지로 해왔노라고 자신 있게 증언하면서 그 분을 격려해야 할 것 같은데, 왜 그 분의 주장과 하는 일이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이렇게 새로운지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 안에서 전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 분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소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 맺힌 아귀다툼의 소리가 아닙니다. 있는 것은 다만 어제와 오늘 뿐이라고 절규하면서 거기에서 온통 삶의 규범을 찾아 오늘을 빚어야 비로소 시대를 사는 인간이라고 하는 소리도 아닙니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뿐이라고 하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희망의 소리'입니다. 회한을 메아리 치게 하며 내일을 닫아버리는 소리가 아닙니다. 미지의 내일을 직면하게 하고, 미래를 설계하며 기다리게 하고, 새로운 누리를 상상하게 하는 꿈의 소리입니다.
유누스는 2030년에 가난박물관을 짓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방글라데시로부터 비롯하여.' 그 해에 우리는 어떤 박물관을 개관해야 할는지요. 우리로부터 비롯하여. 할 수 있다면 그 박물관이 회한박물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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