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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 前 한은 총재, 경제 현안 쓴소리…다음주부터 한국일보에 회고록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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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 前 한은 총재, 경제 현안 쓴소리…다음주부터 한국일보에 회고록 연재

입력
2009.06.30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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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승(73) 전 한국은행 총재는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이다. 학자출신이지만 결코 현실감이 결여된 적이 없었고, 수많은 공직도 맡았지만 한번도 '관변'색채를 풍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영향력 있는' 원로로 남아 있다.

다음주(7일)부터 한국일보에 매주 한차례 회고록을 연재하기에 앞서 30일 기자와 만난 박 전 총재는 경제 현안에 대해 쓴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종합부동산세는 나도 내지만 절대 폐지해선 안 된다" "부자 중심의 감세를 철회하고 그 재원을 서민 민생지원에 써야 한다" "지금처럼 적자재정을 방치하면 올해가 대한민국 국고를 거덜 내는 원년이 될 수 있다"며 평소 지론을 강조했다. 박 전 총재는 "내 경험이 나라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회고록 제의를 수락했다"고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과 역경을 뚫고, 사회의 최고 정점까지 오른 만큼, 숱한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을 듯 싶다. 활자로 처음 공개되는 그의 삶을 통해, 젊은 세대들은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부유했던 가정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박 전 총재의 유년시절은 특히 어려웠다고 한다. 매일 14㎞를 걷는 것도 부족해 40여분간 기차통학을 해야 했던 중ㆍ고교 시절, 그는 어머니가 짠 베옷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값싼 갱지를 묶어 공책과 연습장으로 썼다.

자신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5형제(그는 6남매중 다섯째다)에게 그는 아직도 부채의식을 갖고 산다. 한국은행에 취직해서야 비로소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스스로 "행운아"라 말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몇 번 찾아오는 기회를 잘 잡았다는 뜻이다. 절반은 자신의 판단이지만 절반은 운이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남다른' 행운아다.

박 전 총재가 밝힌 몇 사례. 공고 졸업 후 그는 집안 형편상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지만 더 큰 꿈을 위해 재수를 결심, 결국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첫번째 갈림길에서의 도전이었다.

졸업 후 첫 합격 직장은 한일은행. 하지만 그는 한국은행 조사부에 가고 싶었다. 다른 직장에 붙으면 추천서를 못 받던 시절, 그는 지역 국회의원을 찾아가 추천서를 받아 한은에 응시했다.

'한국은행 해외유학생 1호'로 미국에 가 경제학 박사가 된 것도, 한은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불을 끈 용기를 집행부가 눈 여겨 본 덕이다. 1차 선발시험에 탈락했던 그는 유일하게 재시험을 봐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늘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신조로 살았고 그로 인해 덕을 많이 봤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신을 '근대화의 산 증인'으로 규정했다. 25년 대학교수(중앙대)가 본업이었지만 공직과 금융계를 두루 거치며 경제성장을 도왔다. 분당과 일산은 그가 건설부장관 시절 입안한 도시다. "정계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매번 거절한 것이 그나마 내가 남보다 도덕적 흠이 없이 인생을 살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그는 말했다.

1963년 김종필씨가 공화당 창당을 준비할 당시, 눈가리개를 하고 끌려가 정치를 강권 받았고, 전두환 정권 때도 정계입문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전했다.

김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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