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金聖七)은 1913년에 태어나 1951년에 죽었으니 불과 39년의 짧은 생애였다. 일제하 대구고보를 다니다 동맹휴학 사건으로 1년간 구금됐고, 식민지 엘리트 양성소이던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식민지 최고의 직장이던 조선금융조합에 입사해 이사가 됐으며, 1942년 서른살 나이에 역사 공부를 하겠다고 경성제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기록에 따르면 7권의 번역서, 2권의 단독 저서, 5권의 교과서(공저)와 80여편의 신문ㆍ잡지 기고문과 논문을 쓴, 박람강기 박학다식의 인물이었다.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던 해인 1946년 그가 쓴 <조선역사> 는 6만6,000여 부가 팔린 해방 후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조선역사>
하지만 김성칠은 죽은 지 60여년이 된 지금 우리에게는 <역사 앞에서> 라는 일기를 쓴 이로 기억된다. '한 사학자의 6ㆍ25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역사 앞에서> 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2월부터 6ㆍ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 4월, 죽기 몇 개월 전까지 김성칠이 쓴 일기를 묶은 책이다. 김성칠의 유작인 된 이 일기는 1993년 처츰 책으로 묶여 출판됐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올해 6월, 바로 며칠 전에, 해제와 교주를 추가한 개정판이 출간된 걸 봤다. 역사> 역사>
아마 6ㆍ25가 일어난 지 60년째 되는 2009년 하고도 6월이어서, 그 책의 개정판이 나온 게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당시 30대 사학자였던 김성칠의 일기는 개정판 해제를 붙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한국전쟁기 한국측 자료, 미국측 자료, 미군이 북한에서 노획한 문서철,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러시아문서 등을 종횡으로 짜깁기해서야 다가설 수 있었던 시대상과 진실을 저자는 자기 경험과 통찰력을 통해 단숨에 드러내" 보여준다. 해방 후 서울의 모습과 전쟁 발발, 인민군 점령 하의 생활상, 국군 수복 전후의 좌ㆍ우 갈등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시인 신경림의 말처럼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모두가 너무 아무렇게나 살고, 함부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만드는 글이다.
김성칠은 전쟁을 피해 1951년 10월 고향 영천으로 갔다가 괴한에 피습당해 사망했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역사적 필연성을 믿었으나 성격이 다우지지 못해서 온건한 학구(學究)로 지냈"던 한 지식인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지만 그가 남긴 일기는 한 시대의 증언이자, 역사적 기록이 됐다. 흔히 역사를 거울에 비유하지만 60여년 전에 쓰인 <역사 앞에서> 는 바로 지금 한국 사회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다. 역사>
스스로 "대한민국에 그리 충성된 백성이 아니었다… 그(대한민국)의 해나가는 일이 일마다 올바르지 못한 것 같고 그의 되어가는 품이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서…"라는 김성칠의 말은 지금 대한민국에 대고 해도 한 자 틀릴 것 없겠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민하고 망설이고 한탄한 한 사람의 '학구', 좌에도 우에도 휩쓸리지 않은 자유주의적 지식인이었다. 그 진솔한 모습이 일기의 가치를 더해주는 것이다. 날만 새면 '좌파' '보수'란 시커먼 활자가 한국 신문들을 도배질하는 꼴이 신물나는 요즘, 김성칠이 쓴 일기의 한 구절은 새삼스럽다. "신문기사의 허위보도라고 하면 반드시 어떠한 사실을 날조한 경우에만 한하지 않고 어떠한 사건의 연속 중에서 일부분을 고의로 묵살해 버린다거나 그와 반대로 강조해서 표현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을 어긋나게 함에 있어서 허위보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1946년 4월 22일의 일기)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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