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차가 출발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전쟁은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짐승들의 시체가 우글거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계는 정각을 가리키고
오분이 조금 넘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건물은 다시 올라가고 너는 떨어져 내린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너와 나는 통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행을 떠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소포를 보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자는 빛으로
빛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처음 휘어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장소는 떠난다
그곳을 떠난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 '아무도 없는 곳', 그곳에서는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마치 탄생과 죽음과 그 사이에 있는 삶을 주관하는 곳 같다. 그런데 그 엄청난 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곳에서는 다만 이런저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뿐이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생겨나서 살아가고 언젠가는 이 지상과 이별을 해야 하는 당연한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묻고 싶다, 내가 태어날 때 누군가 나에게 동의를 구했는가, 하는 것. 이런 존재로 살아가도 되겠니?, 라고 나에게 물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더구나 아무도 없는 그곳도 떠난다. 있으면서 없는 곳, 입자가 빛이 되고 그 빛이 처음으로 휘어진 곳. 탄생을 생각해도 죽음을 생각해도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이 떠오르지만 어쩔 것인가, 누구도 선택하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를.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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