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지음/문학동네 발행ㆍ288쪽ㆍ1만원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의 경계에 서있는 여성의 삶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이현수(50)씨가 두 번째 소설집 <장미나무 식기장> 을 냈다. 그가 주로 주목하는 인물은 요즘 여성작가들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자의식 강하고 콧대높은 도시여성이 아니다. 전통적 가부장제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의 탈출구를 만들어가는 시골여성들이다. 장미나무>
작가가 "내 색조에 가장 맞는 소설"이라고 소개한 '추풍령'의 어머니를 보자. 안동 권씨 문중이지만 대대로 남자가 귀한 과부 집안에 시집온 어머니는, 남녀 간의 내외는 물론이요 원색의 옷조차 금지하는 집안의 엄격한 규율을 깬 인물이다. 그녀는 일종의 신들림인 벌떡증을 앓고 있는데, 한번 도지면 석달이고 반년이고 친척집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이상한 것은 친척들의 태도다. 그들은 이 밉상 여인을 귀찮은 내색없이 받아준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엄격한 전통질서에 눌려 살아온 여성들의 억압을 해소시켜주는 무당과 같은 인물이다. 그녀가 천하일미로 소문난 감자탕을 끓여 동네 과부들에게 먹여주는 장면을 작가는 관능적 언어로 그려낸다. "우리집 여자들은 물론이고 동네의 과부란 과부는 모두 뚝배기에 든 감자탕을 바닥까지 알뜰히 긁어먹고는 이튿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절절 끓는 아랫목에서 땀을 비지처럼 흘리며 몸을 지졌다. 그러곤 힘좋은 남자와 한바탕 정사라도 치른 양 노골노골해진 얼굴을 하고 나와 다들 살풀었다고 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기 일쑤였으나 남편이 죽고 나자 나자 모성의 활기찬 에너지를 발산하는 표제작의 어머니도 주목할 만하다. 남편이 버스 사고로 죽자 그녀는 생계를 위해 감, 호두 중간거래상으로 나서고 놀랄 만한 사업수완으로 재산을 모아 딸 셋을 혼자 힘으로 대학에 보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서방 잡아먹고 사람 됐다는 말을 들을 정도지만, 화자인 막내딸은 신새벽부터 창고에서 감과 호두를 싣고 가는 트럭을 기다리던 어머니를 이렇게 떠올린다. "딸들이 자는 동안에도 청보랏빛 어둠을 머리에 이고 온밤을 지키는 어머니가 어찌나 든든한지 절로 코끝이 알알해지곤 했다."
"인간의 삶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는 작가는 민속ㆍ문화재와 관련된 소재를 소설로 형상화하는 데도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포장 전문 학예사가 주인공인 '녹', 불교박물관의 여성 학예관이 주인공인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되는 것들의 목록' 같은 작품에서 작가는 전통 유물과 가옥 등에 대한 박물지적 지식을 치밀한 문장으로 버무려낸다.
"충청, 전라, 경상 삼도가 만나는 충북 영동이 고향"이라는 작가는 "100리 안의 말들이 모두 달랐기 때문인지 생래적으로 방언에 관심이 있었다. 촌스럽고 아무도 안 쓰지만 그래도 내것과 같은 방언을 잘 녹여낼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