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모티프는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진 하얀 앵두에 대한 극작가의 체험이었다. 그는 기억을 곱씹었다. '형체를 가진 모든 것은 사라진다. 대신 누군가에게는 지속적인 인상으로 남는다.
고로 하얀 앵두는 내 기억을 통해 일종의 영원을 얻었다.' 그의 논법에 따르면 인간이 늘어놓는 끊임없는 수다는 타인의 머릿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려는 애달픈 행위다.
그렇게 탄생한 연극 '하얀 앵두'(작 배삼식ㆍ연출 김동현)는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 거기서 비롯되는 삶의 관계들을 그린다. 인간 성찰을 담았지만, 과학을 소재로 한 두산아트센터의 기획 '과학연극 시리즈' 타이틀을 달고 있다.
편협한 인간 중심의 사고로 소멸의 두려움에 얽매이기보다 생명의 소중함에 무게를 싣기 위해 고생물학ㆍ지질학을 이야기의 근간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연극은 과학연극 타이틀에 따라붙는 지적 욕구뿐 아니라 감동의 여운까지 흡족하게 채워줬다.
한물간 작가 반아산(조영진)이 배우인 아내 하영란(이연규), 여고생 딸 지연(최보광)과 전원주택을 얻어 산골에 터전을 잡는 어느 가을날로부터 극은 시작된다. 5억년 전 캄브리아기 지층이 있는 강원도 영월이 배경인 까닭에 반아산의 후배이자 지질학자인 권오평(민복기)과 조교 이소연(주인영)도 이야기를 보탠다.
기실 하나로 잇닿은 줄거리는 없다. 가장 큰 갈등은 반아산의 수캐 원백이가 이웃집 곽지복(박수영) 노인의 암캐를 '겁탈'한 사건과, 미성년자인 지연이 윤리교사 윤조안(백익남)의 아이를 임신한 일이다. 두 사건을 중심으로 극중 캐릭터 사이에 오가는 수다 속에 극작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비교적 분명하게 표현된다.
삼엽충 화석을 꺼내 든 권오평이 "세상이 억울하고 내 꼬라지가 왜 이 모양인가 싶을 때 꺼내 5억년, 100년 사는 인간이 500만번 살았다 죽었다 한 시간을 생각하라"며 화석을 "조급증 약"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릴 법한 시적인 대사들을 자연스럽게 살려낸 조영진, 박수영, 주인영, 민복기 등 배우들은 큰 박수를 받았다. 주요 캐릭터인 개 원백이를 등장시키지 않아 마치 극 전체를 원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7월 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02)708-5001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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