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5시께 대전 둔산동 갤러리백화점 앞. 콜롬비아 출신 쌍둥이 자매 마가리타, 안젤라 아라우호(23)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유니세프 로고가 찍힌 유니폼을 입고 남미의 민속춤 '마카레나'를 추기 시작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어, '미수다'네." 누군가 TV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 중인 마가리타와 안젤라 자매를 알아보고 외쳤다. 관객은 더욱 불어났다. 영국인 칼럼 로버트슨(22)씨의 기타 반주에 맞춰 자우림의 '헤이 헤이 헤이'와 '라밤바' 합창이 이어지자, 박수가 쏟아졌다.
길거리 공연에 나선 이들은 선문대에 재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 9명과 이들의 '멘토'를 자처한 한국 학생 등 20명으로 구성된 '자전거 국토대장정 체험단'. 이들은 22일 천안을 출발해 28일 최종 목적지인 전남 여수까지 428km를 두 바퀴로 달린다.
유학생들은 영국, 아르헨티나, 일본, 콜롬비아, 수단, 시에라리온 출신으로 대부분 유학 생활 3,4년차다. 이들을 고난의 대장정으로 이끈 것은 학교 밖 한국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싶다는 욕심 외에도 한가지가 더 있다.
'다문화 가정 돕기'다. "단일민족이란 자부심 탓인지 많은 한국인들이 다문화 가정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웠다"고 했다. 이들은 중간 기착지마다 길거리 공연을 펼치며 다문화 가정을 돕기 위한 모금도 하고 "다문화 가정에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호소도 하고 있다.
이날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노래와 춤, 악기 연주 등이 1시간 가량 이어지는 동안, 관객들은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였고 모금함에 사랑의 손길이 이어졌다. 첫날 충북 청주에서 쑥스러움 탓에 만족스러운 공연을 펼치지 못한 아쉬움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좋은 뜻으로 뭉쳐 나선 길이지만, 자전거로 6박7일간 천리 길을 내달리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욕심 내다 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에 첫 이틀은 주행거리를 하루 30㎞ 정도로 잡는 등 세심한 계획도 짰다.
그러나 둘째 날부터 부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23일 일사병 증세를 보여 저녁을 걸렀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문화필드, 일본인 에하라 에미리는 주행 도중 넘어져 무릎과 팔꿈치를 다쳤다. 뙤약볕에 탄 팔다리가 벌겋게 달아올라 밤잠을 설쳐야 했다.
24일 단원들의 상태는 더 심해졌다. 이틀만 지나면 자전거에 웬만큼 적응이 될 것으로 예상해 전북 전주까지 90㎞을 달리기로 했는데, 30도가 넘는 폭염이 페달 속도를 늦췄다. 낙오자 발생을 우려해 휴식 시간을 늘리고, 계획에 없던 낮잠 시간도 만들었다.
하지만 주행 속도가 자꾸 떨어지며 결국 예정시간을 4시간이나 넘겨 전주에 닿는 바람에 거리 공연도 포기해야 했다. 단원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저녁마다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강행군에 지친 서로를 격려하며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다.
부상자가 늘자 의무담당 김현화씨가 바빠졌다. 한 살 때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으로 이민을 간 김씨는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고 귀국해 군대를 다녀왔다. 단원 중 유일한 '예비역'인데다 응급구조원으로 활동한 경험도 있어 응급상황 대처 역할을 맡은 그는 퉁퉁 부은 동료들의 다리 안마에 쉬는 시간을 내놓았다.
김씨는 "목적지까지 낙오자 없이 안전하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국토대장정이 쉽지 않은 만큼 다문화 가정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끌어내는 일도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체험단은 경유지에서 거리 공연이 끝나면 인근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고 찜질방으로 간다. 학생회에서 지원 받은 300만원과 1인당 15만원씩 걷은 참가비는 자전거를 사느라 얼마 남지 않아 한 푼이라도 아끼려 숙소를 찜질방으로 정했다.
밥도 저녁 한끼만 사먹고, 아침은 빵으로 때우고 점심은 도로변 그늘에서 직접 해먹는다. 대장정 기간에는 음주와 흡연도 안 하기로 약속했다.
체험단은 국토대장정의 메카로 불리는 해남 '땅끝마을' 대신 여수를 최종 목적지로 택했다. 2012년 세계박람회가 열려 피부색과 나라가 다른 전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여수가 '다문화의 상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여수에 도착하면 타고 간 자전거를 현지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 선물하고, 1대는 다문화 가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수시장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대장정을 기획한 체험단장 문유진씨는 "태어난 나라와 피부색이 제각각인 단원들의 대장정을 지켜보며 많은 사람들이 다문화 가정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국토대장정이 매년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천안·대전·전주=이준호기자 junh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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