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 맡아서 사람 좀 만들어 주이소. 교육도 하고, 훈련도 시키고…" 해방 직후인 1946년 '진주의 만석꾼' 허만정씨는 동동구리무(화장품)로 유명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차린 젊은 사업가 구인회씨를 찾았다. 동업자금을 내놓으면서 셋째 아들(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경영 수업을 부탁한 것. 구씨는 준구씨를 영업이사로 기용한 것을 계기로 허씨가의 사람들을 대거 받아들여 동업에 들어갔다. 구자경 LG명예회장은 "사업이 번창하면서 허씨가에서 자꾸 논을 팔아 증자에 참여하고, 그쪽 형제들도 많이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두 가문의 동업은 1세대 고 구인회-고 허만정씨, 2세대 구자경-고 허준구씨, 3세대 구본무(LG회장)-허창수(GS건설 회장) 씨에 이르기까지 57년간 이어졌다. 두 가문이 '아름다운 동행'을 유지하고, 2004년 계열분리 후에도 협력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형제간에도 분가과정에서 '전쟁(錢爭)'을 치른 경우가 많은 재벌사에서 보기드문 사례다. 경영학자들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 인화 의리 등 유교적 덕목을 동업 성공의 요인으로 꼽고 있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한번 사귄 사람과는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교훈을 남겼다.
▦두 가문의 화합은 창업 초부터 65(구씨) 대 35(허씨)라는 지분율을 엄격하게 지킨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는 허씨들이 GS그룹으로 분리할 때에도 재산분배의 잣대가 됐다. 지분율을 바탕으로 구씨는 전자ㆍ화학ㆍLCD를, 허씨는 정유 건설 유통 홈쇼핑 등을 가져갔다. '구씨는 경영을, 허씨는 안살림을 맡는다'는 역할 분담도 빼놓을 수 없다. 허만정씨가 생전에 "경영은 구씨 집안에서 할 테니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고 후손들에게 당부한 것은 LG의 '관습헌법'으로 작용했다. 분가 전에 허창수 회장은 구본무 회장의 한 발 뒤에 서곤 했다.
▦내달 1일로 두 가문이 동업을 청산한 지 5년이 된다. 재계의 관심은 분가 당시 상대방 사업영역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신사협정'이 지켜질지 여부에 쏠려 있다. GS가 최근 LG상사와 업종이 같은 ㈜쌍용을 인수한 것을 계기로 신사협정이 깨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있기 때문이다. LG가 이에 맞서 건설사 인수를 검토 중이라는 루머도 나돌고 있다. 두 그룹은 상대 업종 진입에 손사래를 치고 있는데,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동업관계가 느슨해지는 것을 감안하면 차후에도 신사협정을 지켜갈지 주목된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